절차탁마Q

절탁 Q 3학기 3차시 수업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17-08-12 19:49
조회
206
암울하지만 대중에게 책임 있는 일을 하면서 명랑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 그런데 그 어떤 것이 명랑함보다 더 필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일도 들뜸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잘되지 못하는 법이다. 힘의 과다야말로 힘에 대한 증거이다.   -후략-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

명랑함, 들뜸, 힘의 과다! 이 느~무 과다한 힘의지를 발산하는 니체를 세 번째 만났습니다. 이번 수업에서는 ‘신체’, ‘힘의지’와 같은 아주 중요한 개념들을 만났습니다. 채운샘은 우리가 정신을 이야기 할 때 신체를, 신체를 이야기할 때는 정신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래서 니체를 읽으며 이런 언어에 대한 감각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셨지요. 스피노자도 그러했지만, 니체가 정신을 얘기할 때는 신체에 대한 정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지요. 스피노자와 니체뿐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모든 철학자들도 신체와 정신을 동시에 이야기한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러한 니체의 ‘신체’를 이해하기 위해 샘은 먼저 ‘망치를 들고’ 철학한 니체를 먼저 만나 보자고 하셨지요.

니체의 사상을 압축해놓은 교과서격인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우상의 황혼』은 그 부제가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에서의 ‘이성’>편에서 니체는 망치를 들고 이전의 철학에서 잘못 생각해 온 개념들과 오류들을 마구 깨부수지요. 영원불변한 존재자로서의 신이라는 개념, 그리고 날조된 ‘참된 세계’, 이성이 만들어낸 온갖 편견들- ‘나’라는 주체, 그 주체가 만들어낸 객관으로서의 사물, 그리고 선,악,미,추 등의 다른 존재들 말입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자들이 말해온 ‘가상’과 ‘참된 세계’ 같은 개념들을 니체는 마구 전복해버립니다. 그 어마어마한 힘의지를 그냥 따라가기만 하는 것도 한참 ‘역부족’이었습니다만...

니체의 역사적 감각

니체는 철학자들에게 역사적 감각이 결여돼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 감각이란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 기원에서 순수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태초, 가장 완전한 시작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서부터 점점 타락해왔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기원이 순수하고 완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지금 현재를 거기에 비추어 가치 평가하게 된다는 뜻이고, 그러면 현재는 언제나 폄하되기 마련이지요. 모든 기원의 철학, 태초의 철학은 목적론이지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언제나 완벽하고 완전한 어떤 것이고, 그 이상이 완전무결한 무언가로 되돌아가야한다고 하는 이 반동적 철학은 그래서 기만일 때가 많습니다. 니체가 말한 역사적 감각의 결여란 이런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생성(become), 감각, 그리고 이성

    니체가 말하려는 ‘신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성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생성은 ‘되다(become)’이지요. 그리고 이 생성과 대조가 되는 것이 ‘존재’, ‘있음’입니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무와 유의 동시성을 내포합니다. 채운샘은 생성을 뭔가가 생겨난다는 존재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붓다가 말하는 멸(滅)도 생성이라고 말씀하시며 동서양의 ‘무’에 대한 사유 방식의 차이로부터 생성에 대한 다른 이해가 생겨나게 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오랫동안 생성이 있고 존재가 있어서, 생성을 있음에서 없음으로, 없음에서 있음이라는 운동적 개념으로 생각했고, 시간을 공간, 즉 위치의 변화로 생각해왔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니체는 철학자들이 생성과 있음, 두 가지를 대립시켜 놓고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지(생성)않고, 되어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생성을 폄하하고, 어떤 것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탈역사화했다고 말합니다. 서양의 형이상학자들에게 생식, 성장, 변화, 죽음, 노쇠와 같은 생성은 ‘머물러 있음’이라는 존재성에 대한 부정이고, 존재에 대한 반박이지요. 그러나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절망하면서까지도 그 존재의 극단에 영원불멸한 어떤 것, 존재자,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존재자는 손에 잡히지 않지요. 그래서 그들은 여기엔 어떤 속임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한 속임수가 바로 ‘감각’이지요. 그들은 감각을 인간이 존재를 투시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장애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재 세계의 모습을 속이고 있다고 말하지요. 플라톤과 같은 형이상학자들에게 실재란 변치 않는 것, 영원불변한 ‘이데아’입니다. 변화무쌍한 것들은 실재가 아니며, 이 실재는 직관할 수는 없지만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감각 때문에 우리와 실재의 사이가 가로막혀있으며, 이 감각으로 인해 속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이것이 형이상학의 구도입니다. 따라서 이들 형이상학자들은 이 감각의 사기에서, 생성에서, 역사에서 허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각에 믿음을 선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급기야 육체, ‘신체’를 버리게 됩니다. 니체는 철학이 어떻게 신체를 버리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는지, 왜 인간이 저 변치 않는 실재 세계를 만들어내고, 왜 그토록 감각을 사유할 수 없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참된 세계’라는 우상을 깨부숨

    그러나 니체는 감각은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감각의 증거를 가지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 표상, 이미지, 상상 같은 것이 비로소 거짓을 집어넣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이 거짓말- 단일성이라는 거짓말, 물성이라는 거짓말, 실체나 지속이라는 거짓말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생성과 소멸과 변화를 보여주는 한,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성이 감각의 증거를 변조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존재라는 것은 공허한 허구 중 하나라고 말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가상’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다. 그리고 물자체이며, 이데아인 ‘참된 세계’란 단지 가상 세계에 덧붙여서 날조된 것일 뿐이다.”

‘최고의 진리’라는 우상을 깨부숨

    니체가 두 번째 망치를 휘두릅니다. 니체는 철학자들이 최후의 것과 최초의 것을 혼동하며 ‘최고의 개념들’을 시작으로서 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고의 가치는 모두 최고 서열의 것으로, 최상의 모든 개념과 존재자, 무조건적인 것과 선, 진리, 완전 이것들은 시작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경험 세계에서 생겨날 수는 없는 것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따라서 이들은 자기원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피노자를 만날 때 맨 처음 우리를 기죽인 이 단어, ‘자기원인’이 이렇게 등장했던 것이로군요! 이들 철학자들은 이렇게 하여 ‘신’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갖게 되지요. 최후의 것, 가장 빈약한 것, 가장 공허한 것이 최초의 것으로, 원인 그 자체로서, 최고로 실제적인 존재자라고 규정되고, 이렇게 하여 그들이 말하는 가장 최고의 것은 ‘빛’=‘이성’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져, 최고로 실제적인 존재자로 규정됩니다. 이것이 형이상학의 역사지요! 니체는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최고 서열의 것들로서의 ‘신’라는 허상을 이렇게 가차 없이 한 방에 깨부숩니다.

‘이성의 편견-표상’을 깨부숨

    사람들은 변화와 변동과 생성을 ‘감각’의 영역으로 치부하여 이것들을 가상성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여 실재에 대한 오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여겼다지요. 그런데 니체는 정작 우리를 오류에 빠지게 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의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감각이 우리를 속이는 게 아니라 그 감각을 가지고 우리가 형성해내는 상상, 부적합한 관념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사태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성의 편견이고 이것이 오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주범이 언어지요. 우리의 감각이 지각한 것을 일단 언어로 표상을 만들어 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부적합한 관념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의 의식은 모든 것에는 행위자가 있고 그 행위자의 주체 의지에 의해 어떤 행위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니체에게는 행위만 있습니다. 행위는 언제나 행위자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행위는 힘의지의 결과로 나타날 뿐입니다. 따라서 니체는 그 행위가 얼마나 능동이냐 수동이냐,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평가할 수 있을 뿐이지 심판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범죄는 일종의 병이고 범죄자는 병자이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과 문장은 이러한 이성의 오류를 지지하는 것들이지요. 니체가 해머로 부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이성의 편견입니다. 니체는 그동안 철학자들이 사용해왔던 실재성, 참된 세계, 가상이라는 말들을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이 때 무화란 그것을 단지 부정하고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지요. ‘참된 세계’와 함께 ‘가상 세계’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실재와 가상이라는 구분 자체를 없애고, 선악이라는 규정성 자체를 넘어가지요. 이 때 선과 악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계속 참된 것을 만들어가는 세계만이 존재하게 되지요. 바로 여기에서 짜라투스트라라는, 만드는 자이며 이행하는 자이고, 건너가는 자로서의 가면이 등장하게 됩니다.

의욕하고 평가하고 창조하는 힘의지, 신체

  니체에게는 생성과 생식이 역사이고 삶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신체성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치 평가하는 기준은 너머의 무엇이었습니다. 참된 것, 실재적인 것, 영원한 것, 이성적인 것. 언제나 삶 바깥의 무언가를 가지고 삶을 평가해왔기 때문에 진짜 삶은 왜소화되고 폄하되기 일쑤였지요. 니체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 삶 안에서, 생성하는 것으로서의 삶을 평가하며 살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건과 사물들을 의욕하고 평가하며 이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냅니다. 이 의욕하고 평가하고 창조하는 것이 바로 힘의지이며, 이것이 자아지요. 그리고 이것을 니체는 신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힘의지에서 니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힘의 느낌입니다. 니체는 힘의 본질은 지배와 발산이며, 투쟁이라고 말합니다. 힘들은 서로 상이한 힘들끼리 투쟁하지요. 이걸 생성이라고 합니다. 힘은 언제나 다른 것들을 지배하고 발산하려고 하지요. 힘은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힘으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니체는 이것이 생명의 본성이라고 봅니다. 인간도 자신의 힘을 타인에게 발산하고 지배하는 방식으로 존재의 고양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그 힘을 어떻게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힘 자체의 능동성입니다.

세계의 다양성- 세계는 해석하는 방식대로 만들어지는 것

니체는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대로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신체를 사물자체라고 말합니다. 해석하는 대로 존재하는 세계. 그렇다면 선악도 하나의 해석이겠지요? 이 때 선이란 무엇일까요? 니체는 선도 하나의 힘의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해석이란 느끼는 것이란 말이지요. 이 말이 되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감각을 끝까지 사유하라고 말합니다. 니체에게 사유란 보고 느끼는 일입니다. 힘의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매번 이 힘의 느낌에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떤 당위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동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쉽진 않겠지요. 우리는 이미 어떤 가치평가의 체계에 굳어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들고 철학한다고 말합니다. 망치를 들고 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들의 ‘우상’입니다. 신이라는 우상, 과학과 역사, 민족, 도덕, 혹은 돈이라는 가치체계, 신념 체계들의 우상. 니체는 그래서 ‘모든 신은 죽었다’고 말하지요. ‘모든 신’이란 우리가 신의 자리에 놓은 모든 것, 이 우상들입니다. 그래서 힘의지는 항상 처절한 투쟁을 벌입니다. 우상으로 작동되는 힘들의 배치에 따라 끊임없이 벌이는 힘의지의 투쟁. 해석은 이 처절한 싸움의 결과지요. 정신은 신체, 즉 힘의지가 싸우고 해석한 결과를 알려주는 일종의 전령사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정신은 해석의 결과만큼을 세계라고 인식하지요.

세계의 이 거대한 다양성은 이 힘의지의 ‘해석하는 다양성, 해석되는 다양성’입니다. ‘차이 자체’입니다. 스피노자의 속성의 개념 생각나시나요? 정신과 육체를 가진 우리는 연장과 사유의 속성으로 세계를 해석하지만, 다른 존재들은 전혀 다른 그들의 방식대로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 그것과 비슷한 말 같습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힘의지는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의지냐, 부정하게 되는 의지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계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긍정과 부정으로서의 힘의지이니까요. 이 힘의지가 바로 이성, 욕망, 본능, 충동들의 집합체로서의 신체입니다. 우리는 매번 ‘내가 발휘하는 힘의지’라고 말하는데요, ‘나’는 이 힘의지가 해석하고 난 뒤, 최후에 우리 의식에 나타나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의지의 결과가 ‘나’란 말씀이지요.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 이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평등

니체가 못견뎌하는 개념들 중 하나가 ‘평등’이지요. 니체는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사람은 평등해서도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평등을 이야기하는 자들을 일컬어 ‘평등의 설교자’, ‘타란툴라’라고 부르며 비판하지요. 니체에게 평등은 ‘증오심’의 다른 이름이지요. 무력감과 질투심, 증오감이 평등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니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평등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 통렬하게 비판했지요. 자본주의는 평등을 전제로 합니다. 어떻게? 추상화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모든 가치를 화폐라는 추상으로 바꾸어 버리는 사회지요. 시간과 상품, 노동활동 뿐 아니라 사람의 능력까지도 모두 화폐로 환산해버립니다. 채운샘은 동양에서 평등을 뜻하는 글자인 平, 等, 均, 제(?)와 같은 글자에는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셨지요.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졌기 때문에 많이 쓰고, 조금 가진 사람은 조금 가졌기 때문에 조금 쓰는 것, 이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평등의 개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균질적인 평등의 개념은 근대가 만들어낸 것이지요. 기독교도 자본주의처럼 이런 균질적 의미의 평등을 내세웁니다. 즉 너희는 모두 똑같이 고통 받고 있다, 죄를 가지고 있다! 결국 기독교의 평등이란 모두가 똑같이 짐을 지고 있다는 의미의 평등입니다. 추상화된 자본주의의 평등과 기독교의 짐진 자의 평등. 니체는 사람이 평등하게 될 수도 없거니와 평등하게 해달라는 건 가장 천한 이들의 요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평등을 말하기에 앞서 이 전제된 평등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선언이어야 하며, 링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링 자체에 무관심한 평등. 베짱이의 힘의 느낌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등을 원하는 한 평등에 대한 요구는 끝이 없습니다. 이는 평등 개념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 표, 일 원, 한 시간, 한 사람 등의 추상을 버리고 나서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생명에 대해 생각해보면 평등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등은 무리 감각을 전제하지요. 추상적으로 하나인 양떼 한 무리. 무리 감각은 차이를 만들지 못합니다.  생성은 서로 다른 힘으로부터 가능합니다. 똑같은 것들끼리는 배움도, 싸움도 일어나지 않으며, 동일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성하는 것에서는 어떤 것도 같은 것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도 善도 서로 다른 것들과의 싸움으로부터 발현되는 것이지요. 똑같은 것들을 전제하는 도덕은 천민의 도덕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질적인 것 속에서 생겨나는 생성. 차이 나는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 불평등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다양한 불평등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채운샘은 지금 이 시대의 불평등은 평등한 상태를 꿈꾸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내려놓는 일을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매우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평등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오히려 심화되고 있진 않은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하겠지요. 니체는 이렇게 기존의 언어들을 망치로 부수고 전도시킨 뒤 그걸 넘어가서 그 단어들을 사용하는 철학을 하지요. 언어에 대한 뉘앙스, 언어에 대해 보다 예민해져야 니체와 더 깊이, 기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과 연민

샘은 이웃 사랑과 연민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채운샘은 이웃을 ‘가까이 있는 자들’이라고 풀이하셨지요. 그리고 연민은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이라지요. 그런데 고통을 아무리 함께 해도 그것은 기쁨이 되질 않지요. 고통을 나누어도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니체는 고통은 병이니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건강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걸 바꾸는 일만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삶에 대한 생각, 고통에 대한 생각, 공기와 습관 등을 바꾸며 새로운 힘을 사용할 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것이 힘들어서 그냥 병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병원에 가는 것은 이행과 극복이 아닙니다. ‘나도 니 아픔을 이해해’라는 위로도 일종의 약이지요.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자들을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너희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지 말고 도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벗,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권합니다(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곳에 있는 사람이란 이질적인 사람이지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란 결국 ‘나 자신’이니까요.

    그럼 연민이 왜 기만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연민은 수치심을 주기 때문에 기만적이라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내가 누군가의 힘에 굴복될 때 느끼는 감정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는 정당하게 벌지 않은 떼돈에 대해 별로 수치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에 무감각해졌다는 뜻일텐데요,  개인적 무의식은 사회적 무의식이기도 한 것이어서, 우리가 그런 것을 수치스럽다고 느끼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체는 연민을 수치심이라는 관점에서 봅니다.  니체는 고결한 사람은 그 대신에 고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마음을 쓰는 자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 기쁨을 느끼지, 받을 때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생명의 본질이지요. 그래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너 고통스럽지?’라는 연민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만약 이 때 수치심을 못 느낀다면 진짜 병들었단 뜻이지요. 그리고 이런 연민은 연민을 보이는 자에게도 수치심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민이 수치심을 주는 힘의 방식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이지요.

연민의 감정이 기만적인 이유는 연민을 주는 자든 받는 자든 누구의 힘도 능동적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관점, 힘의 능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연민은 아주 기만적인, 약자들의 사고방식인 것이지요. 위로는 기쁨이 아닙니다. 슬픔의 유지입니다. 위안은 자신의 힘조차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슬픔을 벗어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걸 힘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너의 어떤 관계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행위는 기만적 행위일 뿐 입니다. 니체는 받는 사람이 선택해서 영예롭게 받을 수 있는 연민의 ‘영예로운 주고 받음’만이 위대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통에 지쳐있는 자가 잠깐 누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딱딱한 야전 침상’이 되어주는 벗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섣부른 연민은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단호하게 경계합니다.

그리고... 고독에 대하여

니체는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사랑이 스스로의 고독을 일종의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채운 샘은 고독에 대해 이런 인상 깊은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고독이란 어떤 것도 의지처로 갖지 않는 시간이다.” 깊이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신 자신을 대면할 때, 어떤 문제를 대면할 때 우리는 대체로 어떤 것에 의지하지요. 그런데 명상과 산책이 철학자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 시간은 뭔가에 의지하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만나는 시간’, ‘완벽하게 홀로 있는 시간’, 이 시간만이 자기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이 고독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한 인간이라지요. 그래서 글을 쓸 땐 이 모든 의지처를 내려놓고 써야 한다고도... 하셨지요.

모든 의지처를 내려놓고 그냥... 나오는 것들을 ... 쓰는 ... 글!!!  '고독'을 실험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전체 6

  • 2017-08-13 18:34
    엄머 깜짝이야;; 근래 보기 드문 분량과 내용을 자랑하는 후기네요! 니체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니체는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대로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신체를 사물자체라고 말합니다. 해석하는 대로 존재하는 세계." 이건 좀 더 설명을 듣고픈 대목이네요. 세계는 해석의 산물이다. 그래서 신체가 사물 자체다...+_+

    • 2017-08-15 15:57
      우리 신체가 느끼는 힘의지는 의욕하고- 평가하고 - 창조하기인데요, 세계는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 속에 있고, 이 생성되는 것들에 대한 평가와 해석으로 매번 다른 세계가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이 무수한 해석의 다양체가 니체가 말하는 세계니까요... 그런데... 우상의 황혼,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에 나오는 대목을 읽으며, 조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어요. 117쪽, '다시 한번 말하자면 사물자체, 사물이라는 개념은 내가 원인이라는 믿음의 단순한 반영이다'??? 이번 수업할 때 질문해보려구요.

  • 2017-08-13 22:30
    읽느라 혼났네요. 참 대단한 정력이십니다요. 저는 지난 시간 수업 들으면서, 제가 사람을 사귀는 방식을 알게 됐습니다. 이웃, 즉 가까운 사람들을 옆에 두고 편안함을 느끼는 방식이었더군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제 의지처였던 것 같아요. 공부하면서 내 안주의 방식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네요.

  • 2017-08-14 02:09
    한 편의 에세이 같군요! ^^ 강의 내용을 빠짐없이, 친절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이성의 편견을 깨부순다는 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말은 쉬운 것 같지만 정작 그게 뭔지 다르게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살아가는데, 자신의 삶을 한 번 의심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일까요? 이성의 편견을 깨부수는 것을 저 나름대로 더 치밀하게 이해해야 될 것 같네요. ㅠㅜ

  • 2017-08-14 08:55
    샘, 후기 걱정하시더니 이렇게 멋진 글을 완성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수업 내용을 다시 한 번 복기하고 놓쳤던 부분들을 채우게 되네요. 고독을 저는 일종의 도피처로 삼았는데 '아무런 의지처를 갖지않고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 2017-08-18 17:23
    고독을 실험해보고 싶다! 해야한다는 당위 너머 하고 싶다는 감각이 살아나게 하는 글이네요^^ 우선 길이가 압도적입니다! 허걱! 수업 전 후기 읽기를 거른 한 주에 이런 긴 글이 올라와 수업 전에 회자되니 안 읽을 수가 없네요 ㅋㅋ 언제나 샘의 열정의 뜨거움에 저도 같이 후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