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숙제방

2학기 4주차 에세이 과제

작성자
이진아
작성일
2021-05-26 13:05
조회
68
규문2021 절차탁마 S 2학기-2주차/내가 만난 스피노자 에세이 초안/2021/05/26/이진아
서진을 종이 귀퉁이에 얹은 다음, 붓끝에 먹을 살짝 묻혀 접시 위로 가져온다. 붓대를 가만히 눌러 돌려 먹이 터럭에 고르게 스며들게 하면서 붓끝을 뾰족하게 다듬는다. 종이 위로 붓을 가져온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붓끝을 종이에 착지시키면서 바로 진행한다. 이런, 이번엔 너무 긴장했나. 선이 너무 경직됐다. 다시 시작한다. 매 순간이 내 의지대로 안되는 현실의 직면이다. 반복에 반복, 무한 루프다.
나는 올해로 5년 째 문인화를 하고 있다. 미술 비전공자로서 내가 처음부터 수묵을 한 것은 아니었다. 2014년 봄, 당시 커리어를 접기 전에는, 장차 그림을 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크릴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6년 인사동 어느 전시회에서 문인화를 만나 매료되었고, 이후 그 작가분을 찾아가 선생님으로 모시고 배우기 시작하면서 수묵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공부하다가, 나중에 제주에 계시는 다른 선생님을 찾아 지금까지 그 선생님께 문인화를 배우고 있다. 이 공부가 오래 걸린다는 것은 배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4년째였던 작년에서야 매란국죽 사군자를 겨우 마쳤다. 마쳤다고 하지만 마스터 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붓과 먹을 다루는 기본을 익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군자 외에 연, 모란, 소나무, 목련, 파초, 포도를 합한 십군자 중 아직 둘을 더 남겨두고 있다.
작년에 다수의 공모전과 그룹전시회를 연이어 준비하고는 가을 초입에 번아웃이 왔다. 매년 그 맘 때의 데쟈뷔다. 3개월 쉰 후 겨우 다시 화실에 나갔지난 붓을 잡기가 조심스러웠다.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아 몸이 사려졌다. 당분간은 쉬엄쉬엄 하자.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전과 다르다. 지금까지의 붓작업, 나의 선線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속도와 힘을 강조하시는 선생님의 線과 다른, 부드러운 선을 구사하고 싶다. 기운생동이라고 기력을 쏟아부어야만 할까. 기존의 방식으로 붓을 다루는 것이 지속가능한 것 같지 않다. 나는 힘을 빼고 싶다. 완급이 있는 유연한 선을 찾고 싶다. 그렇게 3개월 의문을 품고 설렁설렁,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모란을 연습하고 있는데 그룹전 일정을 준비하라며 선생님이 깜짝 발표를 하신다. 5월말까지만 화실을 하고 제주를 떠난다신다. 아니, 우린 어떻게 하라고? 공부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포함한 학생들 모두 멘붕이 왔다. 화실 종료 발표 이후 두 달, 그간 마음 속에 많은 변화가 조수 처럼 일었다. 제주와 서울을 왕복하며 지금 선생님께 계속 배워야겠다 싶다가, 나를 문인화로 이끄신 첫 선생님의 월1회 제주팀 수업으로 갈까 어떨까도 싶다가, 문득 내 그림은 언제 그릴거니 묻는다. 검객이 검에 대해 그러하듯, 붓과 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묵객墨客이 되기 위해. 5년간 칼날만 벼리고 있다. 이젠 내 그림을 그려야지. 그런데 내 그림이라면 어떤 그림이지?
드로잉과 아크릴화를 그릴 당시, 나는 그림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자신의 선과 터치를 가지고 자기 이미지로 표현해 낼 때 자기 그림이라 할 수 있지, 누군가에게 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문인화 선생님들은 다들 입을 모아 “법이 있고, 법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 문인화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문인화에서 먹과 선을 다루는 법은 완성된 그림을 체본 삼아 임모 즉, 베끼기를 한다고 다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붓을 잡는 법부터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가장 기본인 중봉도 모른 채 붓을 마음대로 쥐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선 하나에 농담이 다 담긴 중봉선을 그을 수 없다. 선을 읽는 법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문인화는 대상을 표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을 담아야 한다. 그림을 통해 보는 이에게 그린 이의 에너지를 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인화는 화법, 필법, 법이 중요하다. 선을 알고 법을 알아야 할 수 있다고 해서 계속 법을 배워왔다. 선생님 떠나시기 전 전공인 산수화도 익혀 두자 하여 속성이지만 산수화도 배우고 있다. 그런데 산수화도 역시, 법을 알아야 한다. 근경, 중경, 원경, 그리고 돌, 나무, 풀 등 준법들이 있다. 학습의 연속이다. 여하튼 법을 알아야 하는 문인화를 배우겠다 했고, 선생님의 잔소리와 꾸중, 한치라도 어긋날까 감시 서린(?) 선생님의 눈빛을 감사히 받아가며, 선과 먹을 다루는 법을 익혀 왔다.
법을 익혀야 하는 이 그림을 내가 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애초에 인생 2막을 그림으로 잡은 것은,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통역 일을 오랫동안 하면서 정작 나를 표현하는 기능은 정지, 아니 퇴화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말을 해왔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며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점도 좋았다. 그런데, 자유롭게 표현하기는 커녕, 내면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아예 망각된 건 아닌가? 법은 형식인데, 형식만 가득하고 내용은 비어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것이 문인화인가? 내가 세상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한 전통의 답습에서 한 발치라도 나가봤는가? 그저 답습이라면, 내가 하는 이 행위는 많은 종이를 소비하고, 먹물을 씻어 내며 지구를 오염시키는, 그리고 공연히 내 체력을 낭비하는, 자기만족적 소모적 행위가 아닌가? 이러려고 붓을 잡은 건 아닌데 말이다. 문인화는 본디 문인이 그린 그림인데, 문인은 어디 있지? 문인은 뭘까? 그림을 통해 너의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지? 표현하기 전에 나를 둘러싼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자 하는가. 2학기 에세이 작업을 시작하려는 타이밍에 내가 해온 그림에 대해 내 안에서 총체적인 의문이 제기되었고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지금 내가 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공부가 삶의 태도를 다루는 것이라면, 필시 내 행위에 관한 중요한 이 문제들에도 답을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에세이를 쓰면서 답을 찾기로 했다.
오늘날 문인이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 즉, 작가, 시인 등을 지칭한다면, 조선시대에는 선비 또는 문관의 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컬어 문인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지식인인 문인들은 여기(余技)로 행한 문인화에서 화제(글)에 자신의 생각을 담고, 사군자 또는 십군자와 같은 사물, 또는 스피노자의 언어로는 실재들things을 이미지로 삼아,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신을 표현했다. 주목할 점은, 당시 문인들은 그림의 테크닉 보다 그리는 이의 정신과 교양을 더 중요시했고, 정신과 교양을 그림의 격格(격조)을 이루기 위한 전제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 전제가 문인화의 본질일 것이다. 이렇게 그림에 담긴 문인의 내면세계가 문인들의 그림과 전문 화가인 화원들의 그림을 구별해주었다. 소박하고 담백한 경향의 문인화는 이후 하나의 화풍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문인화라고 하면 전통적인 그림 양식을 떠올리기 쉽지만, 앞에서 언급한 본질에 비추어본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인화를 한다는 것은 그림만 열심히, 그리고 잘 그리는 것으로 성립될 수 없다. 지성과 정신을 닦고 수행해야 격이 살아 있는 문인화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니, 재작년 공부공동체를 찾아 인문학 공부를 한 후 지난 해 제주에서 글쓰는 책모임을 시작한 것에 이어, 올해 규문에서 스피노자 공부를 하며 사유와 글쓰기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그림의 형식에 치중했던 내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문인화의 본질에 은연중에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던 것도 같다.
문인화에서 소재를 통해 그리는 이 즉 휘호자의 정신을 표현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탁물托物이라고도 한다. ‘마음이 지향하는 자세를 사물의 속성에 미루는 것’이다. 문인화에서 대표적인 소재로 이용되는 사군자는 매란국죽의 자연물이다. 과거의 문인들은 왜 특정 사물, 그 중에서도 자연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의 정신을 표현하려 했을까? 추상적인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개인의 심상을 표현한다든가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자연물이었을까? 묵매, 묵란, 묵국, 묵죽과 같이 문인화의 사군자는 단순한 화초나 나무가 아닌, 문인 자신이 되고자 하는 군자, 즉, 덕(인품)과 학식을 이룬 완전한 인격체를 상징한다. 스피노자의 언어로 하면, 완전한 인격이 자연물의 이미지로 변용된 양태가 사군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 동아시아의 문인들이 임의로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아닌 자연 속에서 어떤 완전성, 본질을 찾으려 했고 탁물하려고 했던 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보았던 스피노자처럼, 조선시대 문인들 역시 자연의 완전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관념,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물과 자신을 동일시 여기고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추구하고 있었고 이를 표현한 것이 문인들의 사군자였을 것이다. 스피노자와 문인들은 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 듯 하다. 여하튼, 문인화에서 단지 매란국죽을 아름답게 그리려고 한다거나, 보는 이가 매란국죽의 형상만을 본다면 본질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인화의 본래 정신에 대해 에세이 글로 쓰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 그동안 내가 이런 개념들을 이미 아는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아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느 새 최선의 시각적 형상을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었고, ‘붓작업’은 기술적인 뉘앙스의 단어 그대로 기술적인 행위가 되고 있었던 듯 하다. 문인화의 정신은 어디에 담아내고 있었을까? 그림과 문인 정신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피상적인 지식은 앎이 아니다. 나는 스피노자의 말 처럼, “파편적이고 혼란스런 관념이 함축하는, 앎의 결여인 거짓”된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갔다면 하마터면 그림만 그리는 그림쟁이가 될 뻔했다.
그런데, 에티카 2부 정리 16에서 스피노자는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mode에 대한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본성도 함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명에서 그 까닭은 신체(뭂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되는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변용되는 방식들에 대한 관념은 두 물체 모두의 본셩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게 되고, 따라서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어지는 방식에 대한 관념은 신체와 외부 물체의 본성을 모두 함축한다는 것이다.
감각과 지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행위로서의 그리기는 외부 사물에 의해 내가 변용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스피노자의 정리에 의하면, 내가 묵란을 치는 순간, 난을 치고 있다는 행위에 대한 관념은 나의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난초의 본성도 함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 않을까? (양태로서의 사유와 예술)
스피노자는 이어서 정서의 본성과 기원에 관한 에티카 3부의 정리 27에서, 우리와 유사하고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갖지 않았던 어떤 실재가 어떤 정서에 의해 변용된다고 우리가 상상함에 따라 우리 자신이 유사한 정서에 의해 똑같이 변용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명에서 또한 실재들의 이미지들은 인간 신체의 변용들이며, 그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을 마치 우리에게 현존하는 것처럼 재현한다고 설명한다. 휘호자가 사군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재현하는 행위에서 사순자의 이미지는 휘호자의 신체를 변용시키고 휘호자가 상상한 사군자의 정서-지조, 기백과 같은 정서가 그리는 이의 정서를 그에 닮게 변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감각과 지각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행위로서의 그리기. 변용. 양태로서의 사유와 예술.
- 이미지와 텍스트 (에티카 2부 정리49 주석) “관념은 어떤 실재의 이미지에서도 단어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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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표현하고 싶다고 한 그 처음의 욕망에 비추어 보면, 나를 표현하겠다는 8년전의 욕망은 지금도 내게 유효한가 물어본다. 그림을 그린다면서 규정되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동시에 아니 선행하여 작용하는 이 행위를 내 그림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동안 그림을 대하는 나의 관점은 많이 변화했다. 막연히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보는 세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으로 조금 구체화 되었고, 좀더 나아가 ‘나’라는 ‘자아’를 가능한 한 최대한 비워낸 내가 본 세상을 담아내는 경험에 도달해보고 싶다.
형식에 매이고 구속당하면서 나를, 아니 내가 본 세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법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법은 인간이 규정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법으로 감각과 지각을 통한 세상과의 만남을 규정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그동안 그렇게 법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그 법도 버릴 수 있어야 기존의 답습에서 한 발치라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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