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에이징 세미나

1.29 몸세미나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1-27 20:55
조회
105
200129 몸살림 세미나 공지

 

떡국 맛있게 드셨나요? ^-^

다음 시간이 몸-살림 세미나 1시즌 마지막 시간입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끝까지 읽어 오시구요, 다음 시즌 몸-살림 세미나 신청 댓글 어서 달아주세요~!

 
이번 시간에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 3장 ‘문화적 병원병’을 읽었습니다. 이 장에서 일리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의료제도는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견딜 능력을 말살하고, 죽음 역시 의료적 문제로 환원하고 말았다는 것이죠. 우리는 고통을 최대한 느끼지 않는 것을 좋다고 여기고, 또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해 두려워합니다.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서 진통제를 처방받고, 죽음을 앞둔 사람은 병원에 가서 연명치료를 받다가 의사의 사망진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이 사실 ‘문화적’이며,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리치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풍속은 ‘문화가 의료화되는 세계’에서나 당연한 일이며, 사실 고통도 죽음도 부조건 말살하고 멀리해야 하는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신체적 고통은 내재적이고 친근하며 전달 불가능한 비가치로서 체험되는 것이나, 그것은 우리들의 의식 중에, 고뇌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적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테제이다. 사회의 성격이 어느 정도까지는 고뇌하는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의 신체적 고통과 상처를 구체적인 고통으로 체험하는 방법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의 의료화에 수반된 고통의 체험이 진보적으로 변환된 방향을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 고통에 고뇌하는 행위는 이미 역사적 차원의 것이 되고 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154쪽)

 

일리치에 따르면 고통은 가치없고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찰되고 고뇌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고통에 대해 고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처리하는 갖가지 기예들이 동반되었지요. 하지만 고통의 의료화는 이러한 양식들을 기술적으로 처리하는 것만을 부각시켰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치료될 수 있다고 규정된 고통은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지자 고통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되게 되었고 말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고통 하면 병원만을 해결책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더 노골적입니다. 일리치는 죽음의 의료화를 통해 ‘자연사’라는 것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고를 당해 죽거나 병에 걸려 입원실에서 죽을 뿐입니다. 이로써 ‘죽을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죠. 이전에는 죽음을 맞아들이는 이식이 있었습니다. 산 자들과 인사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때 의사가 하는 일은 치료를 돕거나 쉽고 빨리 죽음이 찾아오도록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환자가 이미 죽음의 손바닥 속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특별한 징후를 인정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이자 역할이었지요. 어떻게 보면 이전 사람들에게 죽음과 고통은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의료화는 모두 ‘입원시켜’ 버렸다고 일리치는 말합니다.
<동의보감>에서 인명은 결국 천명이라고 말합니다. 의사가 하는 일은 그렇다고 손놓고 볼 수만은 없어 생을 잘 보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하지요. 이때의 의사와 지금 ‘의료화’의 차이는 역시 의존도인 것 같습니다. 누구도 자연스럽게 살게 하지 않는 제도화된 의료에 환원되지 않도록, 좀 더 다양한 길을 낼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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