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12월 4일 에세이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11-22 21:13
조회
120
‘인간적인’ 1, 2권을 끝내고 온 탓일까요? 《아침놀》은 금방 읽힌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5권 후반부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눴죠. 우선 마지막 절 “우리, 정신의 비행사들!”을 중심으로 니체의 ‘인류애’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그동안 니체를 차갑고 딱딱하게만 봤었는데, 마지막 절을 포함한 5권 후반부의 몇몇 구절들이 그를 다시 보게 해 주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죠. 가령 마지막 절에서 니체는, 가장 멀리까지 날아가는 모든 새들이 “돛이나 황량한 절벽에” 내려앉을지라도 “그들 앞에 [그들이 날 수 있는] 거대한 어떤 길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며 그들이 날 수 있는 최대한을 다 날았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고, 나도 그대도 어느 지점에 멈춰 서게 되겠지만 “다른 새들은 더 멀리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552절에서는 임신한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임신한 상태에서 “우리는 수중에 아기의 가치와 아기가 나올 시간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의 가장 은밀한 희망은 “여기서 자라고 있는 아기가 우리보다 위대하다”는 것이라고 말하죠.

분명 이런 구절들에서 니체는 ‘인류애’에 해당하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때 니체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코 그가 소유하거나 동일시 할 수 없는 어떤 것, 그가 가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그것의 시간을 결정할 수도 없는 어떤 ‘도래할 것’이라는 점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도래할 것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고 말하면서 은밀하게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거나, 스스로를 재생산하고자 하는 소유욕과는 무관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깨끗하게 몰락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는 일이 아닐까요?

553절 “우회로에서”도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철학을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라고 정의합니다. 철학이란,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 나름대로의 건강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추구하려는 본능”이라는 것이죠. 니체가 이렇게 철학을 정의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철학자’에 국한된 것도, ‘이성’에 한정된 것도, ‘인간’의 특권도 아니게 됩니다. 니체는 “비록 그것이 나의 철학이 아닐지라도”, “나비를 위해서도 하나의 철학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553절은 감동적인 구절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혁명적(?)인 구절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는 ‘철학’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동시에 ‘건강’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철학은 사변적 진리가 아니라 신체와 신체의 능동성에 관한 것으로 정의 됩니다. 또한 건강의 추구는 육체의 보존이나 척도로서의 ‘건강’과 무관한, ‘철학’을, 다시 말해 고유한 건강의 발명을 요구하는 활동으로 이해됩니다. 니체는 진리를 자임하는 ‘대문자 철학’의 총체화를 거부하고 아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건강법으로서의 n개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545절에서 니체는 자신에게 도덕을 말할 자격에 대해 말합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내면에서 역사를, 큰 동요를, 지진을, 오랫동안 지속되는 큰 슬픔을, 섬광 같은 행복을 체험했는가? 그대들은 크고 작은 바보들과 함께 바보로 존재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선량한 인간들의 광기와 아픔을 정말 체험했는가? 그리고 최악의 인간들의 아픔과 행복을 체험했는가? 그렇다면 내게 도덕에 대해 말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말하지 말라!” 여기서 니체의 ‘자기극복’을 절절하게 느끼셨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기독교, 문헌학, 바그너(독일적인 것), 쇼펜하우어 등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겪었을 몰락과 자기극복의 경험이 저 구절에서 느껴졌다는 말씀이셨죠. 저도 여기서 니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경험주의 따위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난 뒤에야 도덕을 말할 자격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본 자만이 다시 도덕에 대해 말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61절에서 니체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증언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떠나 방랑을 한 뒤”라야 한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죠.

한주 동안 에세이 준비 기간을 갖고 12월 4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a4용지 3장 내외의 《아침놀》을 마무리하는 에세이와 약간의 간식을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에세이 발표는 12월 4일 1시에 시작합니다~ 그럼 다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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