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 자한 24,25장, 27장~끝

작성자
오영
작성일
2017-08-10 11:19
조회
136
9-24. 子曰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과 신의를 주로 삼고, 나보다 못한 자를 벗하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마라.”

 

重出而逸其半.

거듭 나온 것인데 그 반은 없어졌다.

 

學而篇(1-8),

子曰, “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9-25. 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군의 장수는 뺏을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뺏을 수 없다.”

 

侯氏曰 「三軍之勇在人, 匹夫之志在己. 故帥可奪而志不可奪, 如可奪, 則亦不足謂之志矣.」

후씨가 말했다. ‘삼군의 용맹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필부의 뜻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수는 뺏을 수 있어도 뜻은 뺏을 수 없다. 만약 뺏을 수 있는 것이라면 뜻(志)이라고 할 수 없다.

 

뜻을 빼앗을 수 없는 사례(?) [춘추좌전 소공 20년]

제경공이 사냥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몰이꾼에게 대부용 깃발로 신호를 보내니 몰이꾼이 자신을 부르는데 쓰는 피관(皮冠)이 아니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제경공이 명령불복종을 들어 몰이꾼을 죽이려하니 몰이꾼이 자신을 부르는 깃발이 아니었기에 움직이지 않았다며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제경공에게 당당하게 말하여 살아났다.

 

9-27. 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날이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

 

范氏曰, 小人之在治 或與君子無異 惟臨利害 遇事變 然後君子之所守可見也.

범씨가 말했다. “소인은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혹시 군자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오직 이해관계에 당면하고 사변을 만난 후에야 군자가 지키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謝氏曰, 士窮 見節義 世亂 識忠臣 欲學者必周於德.

사씨가 말했다. “선비가 궁할 때 절의를 볼 수 있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충신을 알 수 있으니, 배우는 자는 반드시 덕이 완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작품으로 손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歲寒圖의 제호가 위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9-28. 子曰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자는 미혹되지 않고, 어진 자는 걱정하지 아니하며,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明足以燭理, 故不惑; 理足以勝私, 故不憂; 氣足以配道義, 故不懼. 此學之序也.

밝음(판단력)이 족히 이치를 밝힐 수 있으므로 미혹되지 아니한다. 이치는 족히 사사로움을 극복할 수 있으므로 근심이 없다. 기운은 족히 도와 의에 배합되니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배움의 순서이다.

 

9-29.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더불어 함께 배울수는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다. 더불어 도에 나아가더라도 같이 설 수는 없다. 같이 서더라도 더불어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

 

可與者, 言其可與共爲此事也.

가여란 더불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程子曰 「可與共學, 知所以求之也. 可與適道, 知所往也. 可與立者, 篤志固執而不變也. 權, 稱錘 也, 所以稱物而知輕重者也. 可與權, 謂能權輕重, 使合義也.」

정자가 말했다. ‘같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할 지를 안다는 것이다. 같이 도를 걷는다는 것은 갈 곳을 안다는 것이다. 같이 설 수 있다는 것은, 뜻을 돈독히 단단히 부여잡아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은 저울의 추이니 경중을 아는 도구이다. 같이 권도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능히 경중을 헤아려 도의에 부합시킴을 말한다.’

 

楊氏曰 「知爲己, 則可與共學矣. 學足以明善, 然後可與適道. 信道篤, 然後可與立. 知時措之宜, 然後可與權.」

양씨가 말했다. ‘자신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알면 함께 배울 수 있고, 배움이 선(善)을 밝히기에 충분한 뒤에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다. 도를 독실하게 믿은 연후에 같이 설 수 있고, 때에 맞게 합당하게 조치할 줄 안 뒤에 더불어 권도를 행할 수 있다.’

 

洪氏曰 「易九卦, 終於巽以行權. 權者, 聖人之大用. 未能立而言權, 猶人未能立而欲行, 鮮不仆矣.」

홍씨가 말했다. ‘역의 아홉 괘는 손이행권(손괘로 권도를 행함)으로 끝맺는다. 권이란 성인의 큰 작용이다. 설 수 없으면서 권을 논함은, 마치 설 줄도 모르는 아이가 걸으려는 것 같아서 넘어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程子曰 「漢儒以反經合道爲權, 故有權變權術之論, 皆非也. 權只是經也. 自漢以下, 無人識權字.」

정이천이 말했다. ‘한나라 유생들은 경을 뒤집어 도에는 합치시키는 것을 권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권변, 권술을 논했는데 이는 모두 잘못이다. 권은 다만 경일 따름이다. 한나라 이래로 아무도 권(權)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愚按 先儒誤以此章連下文偏其反而爲一章, 故有反經合道之說. 程子非之, 是矣. 然以孟子嫂溺援 之以手之義推之, 則權與經亦當有辨.

내 살피건대, 선유는 잘못하여 이 장을 다음 장의 편기반이와 합쳐 잘못 묶었기 때문에, 반합경도(경을 뒤집어 도에 합치함)의 설이 있었다. 정자가 그것을 비판했으니 옳다. 다만 맹자의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으로 잡아당겨 구원한다.’는 의미로 추론하면 권(임시방편적인?)과 경(일정한 법도?)은 당연히 구별된다.

 

9-30. 唐棣之華, 偏其反而. 豈不爾思? 室是遠而.

당체꽃이 나부끼는데 어찌 그대를 생각하지 않으랴마는 집이 너무 멀구나!”

 

唐棣, 郁李也. 偏, 晉書作翩. 然則反亦當與翻同, 言華之搖動也. 而, 語助也. 此逸詩也, 於六義屬興. 上兩句無意義, 但以起下兩句之辭耳. 其所謂爾, 亦不知其何所指也.

당체는 산앵두이다. 편은 진서에는 翩(나부낄 편)으로 되어 있다. 그런즉 反 또한 마땅히 翻(뒤집을 번)과 같이 꽃이 너울거린다는 뜻이다. 而는 어조사. 이것은 빠진 시이다. 六義(시경 육체의 분류법으로 風雅頌興賦比)로는 흥(흥기시키는 시)에 속한다. 앞의 두 구절은 의미가 없지만 뒤 두 구절을 일으키는 말이다. 소위 爾(그대)는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다.

 

子曰, “未之思也, 夫何遠之有?”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어찌 멀리 있겠느냐.”

 

夫子借其言而反之, 蓋前篇 「仁遠乎哉」 之意.

공자께서 시의 말을 빌려 그 뜻을 반박한 것이다. 대개 전편의 ‘인이 멀리 있겠는가.’라는 뜻과 같다.

 

述而篇(7-29),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程子曰 「聖人未嘗言易以驕人之志, 亦未嘗言難以阻人之進. 但曰未之思也, 夫何遠之有? 此言極有涵蓄, 意思深遠.」

정자가 말했다. ‘성인은 ’쉽다‘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뜻을 교만하게 한 적도 없고, 또한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사람의 나아감을 가로막으신 적도 없다. 다만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어찌 멀리 있겠느냐? 라고만 말씀하셨으니 이 말은 지극히 함축적이고 의미가 심원하다.

 
전체 2

  • 2017-08-10 11:24
    후기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내가 후기 올려야 된다는 생각은 안하고 그냥 나중에 후기 읽으면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다가 날 고생을 했습니다.
    수업은 들었지만 다시 보니 해석이 정말 어렵더군요.
    그리고 아직까지 권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권도에 대한 생각을 각자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요일날 뵙겠습니다.

  • 2017-08-10 12:05
    파란색으로 보기 좋게 정리해주셨네요~ 고생한 보람(?)이 있는 후기네요. ㅋㅋㅋ 권도의 권이 가운데 추가 있는 저울을 뜻한다고 하는 게 생각나네요. 저는 가운데 추를 움직여서 무게중심을 맞추듯, 원칙을 기반으로 각각의 상황에 맞게 실천하는 것을 권도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권도까지 같이 딱 맞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같이 도모할 수 있다네요. 그런데 권도까지 딱 맞는 게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