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숙제방

서론&1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01-17 23:44
조회
149
2017.01.17 / 소세키 글쓰기 / 이응

들어가며
소세키는 런던 유학생활의 불쾌와 혐오로 줄곧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경쇠약의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에는 이상할 정도로 암울하거나 냉담한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심각한 사태를 묘사하더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몇 방울의 유머가 섞여 들어가 있다. 대체 신경쇠약을 앓았던게 사실이긴 한건가. 불쾌했다던 그 시기에 쓰여진 글들은 어째서 이리도 경쾌하고 익살맞은 건지. 그 정신 구조가 실로 궁금해진다.

(유머적 정신태도로 연결)
프로이트는 <유머>라는 논문에서 유머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유머의 본질은 (불쾌한)상황이 자아낼 수 있는 정서적 흥분들을 절약하고 익살을 통해 그러한 감정적 표현들의 가능성을 물리치는 데에 있다.”

즉 유머를 드러내는 사람은 ‘화를 내거나, 푸념을 하거나, 고통을 드러내거나, 놀라거나, 전율을 느끼며 절망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상황에서 그런 감정적 흥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익살을 떨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머적인 태도란, 고통스러운 처지에 처해 있음에도 거기에 압도되지 않고 시각을 전복시키는 유연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소세키가 보여주는 것은 확실히 유머적 정신태도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이런 유머적 정신태도를 지닌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 글이 신경쇠약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에 쓰여졌다는 점을 염두한다면, 소세키가 구사하는 유머가 상당한 스트레스와 역경에 도전적으로 대처하려는 정신 방법의 하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고양이는 왜 소설이 될 수 없었을까 : 분열된 자아

<고양이>에는 태어난지 얼마 안된 새끼 고양이가 ‘화자’로 등장한다. 새끼 고양이라고는 하지만 인간과 고양이는 나이를 셈하는 법이 다르니 인간의 기준으로 마냥 어리숙하게 봐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나름의 자기 관점과 세계관을 갖춘 영묘한 고양이다. 만일 인력거집으로 인연이 닿았다면 힘깨나 쓰는 고양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중학교 선생 집으로 인연이 닿는 바람에 머리깨나 쓰는, 심지어 사생을 짓는 고양이가 되었다. 고양이는 주인 곁에서 주인인 구샤미를 비롯, 그 집에 드나드는 한가한 인간들을 관찰하며 ‘인간 혹은 문명인 관찰론’을 펼쳐내는 것을 주 일과로 삼고 있다.
주인집은 누추하지만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다. 주인 구샤미가 세심하고 배려 넘치는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라서, 무디고 별 생각 없는 사람이라서 한량같은 인물들이 제집처럼 드나들듯 드나드는 아지트가 된 것이다. 이 집에 발걸음 하는 인물들은 미학자라던지, 이학사라던지 하는 교양인 무리로, 보통 사람은 못 알아먹을 저 그리스 아테네부터 중국 고승의 말까지 끌어와 만담을 나누는데 알고보면 엉뚱한 소리 일색이다. 그 와중에 제정신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고양이라 할 수 있다. 고양이는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스스로 괴로워하는’ 인간 군상을 한심하게 여기지만, 고양이의 묘사를 듣고 있자면 어쩐지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이 생긴다.
잘 보일 필요도 없고 지켜야 할 예법도 없는 주인집에서 사람들은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이야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대부분 들어도 별 소득 없는 이야기들 뿐이지만 일당 백 한량들의 만담을 듣고 있자면 하도 엉뚱하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 피식 웃음이 난다. 미래에는 자살이 정식 과목으로 등장할 거라는 둥, 개성이 발달하여 ‘나는 나, 남은 남’이 되면 결혼도 예술도 사라질 것이라는 둥, 한낱 가볍고 우스갯소리 같은 말들이지만 듣고 있다 보면 묘하게 설득되어 마치 앞날을 예언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한량들이 특별한 일 없이 모여서 쓸데없는 대화를 일삼는 것은, 실제로 소세키가 자신의 서재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열었던 ‘목요회’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구샤미가 소세키 자신을 희화화했다는 것은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는 바이다(구샤미의 직업이 선생이라는 것, 위가 약하고 신경쇠약의 기미를 보인다는 것, 곰보로 고민했다는 것 등). 코털을 뽑아 원고지 위에 정중하게 심어 놓는다던지, 굴처럼 서재에 들러붙어 침 흘리며 졸고 있는 구샤미를 떠올리면 소세키가 어떤 인물이었을지가 그려져 웃음이 나면서도, 이처럼 자신을 희화화할 수 있는 소세키가 대단해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화자인 고양이 또한 작가 자신이라는 점이다. 소세키는 구샤미의 입장에서 구샤미를 그리는가 하면 구샤미를 주시하는 고양이의 입장에서도 구샤미를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소세키는 구샤미이기도 하고, 고양이기도 한 내적 분열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시선은 신경쇠약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유머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즉 현실의 ‘나’는 자못 심각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위상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나’가 있기 때문에 독자는 ‘심각한 나’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나’로 초점을 옮기면서 ‘나’가 취한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초점의 이동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다른 위상에서 바라보도록 시점을 전환시켜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억압된 내면을 해소하여 웃음을 유발한다.
이것을 프로이트 식으로 설명하면, 유머를 보이는 사람은 정신적 강조점을 ‘자아’에서 ‘초자아’로 옮기면서 자아가 처한 현실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초자아가 자아의 심급을 격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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