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1학기 에세이 발표 후기 및 4월 26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4-23 19:01
조회
285
에고... 또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장장 12시간 동안 진행된 에세이 발표가 끝이 났네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주에 바로 스피노자를 만나지만, 에세이 발표 때 보여주신 그 열정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ㅎㅎ

<아침 에세이 발표 시간>
이 날 채운쌤은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밑에 있는 사진을 주목하시면 부드러운 모습의 채운쌤을 보실 수 있습니다.(근데 잘 안보이네요. ㅜㅜ)


지금 시대에서 우리가 지식을 표상할 때, 그것은 실천으로 체화돼야 할 것, 실천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방식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지식은 책 속에 들어있고 교육은 책 속에 있는 지식을 배워서 삶에 접속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서 실천과 앎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천을 통해 지식을 구성했습니다. 채운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가 아는 대로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결론은 지금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앎과 실천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 전에 왜 앎과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지, 그때의 앎은 무엇인지를 의심해보라고 하셨습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존경한 것은 그가 무엇을 알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앎에 이르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교육방법이 산파술인데,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줄 때의 그 산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디까지나 앎에 이르도록 옆에서 거드는 것이죠. 여기서 고대의 배움과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철학자를 육성하기 위해 길고 긴 교육과정을 제시하지만 결국 마지막 단계는 변증법이라는 대화술입니다. 저는 이게 이상했는데, 왜 이데아를 인식하는 방법으로 대화를 제시한 걸까요?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일방적으로 스승으로부터 제자가 지식을 전수받는 배움과 가르침과는 사뭇 다른 방식입니다. 채운쌤은 변증술의 원어인 dialtike를 '서로의 마음에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논어에도 플라톤의 교육방식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스승이 한 모퉁이를 들어줬을 때, 제자가 그것에 반응하여 나머지 세 모퉁이를 들지 않으면 배움은 소용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아무리 스승이 가르쳐주려 해도 자신이 마음을 내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이죠.(찔리는군요.) 배움에 있어서 타자가 필요하다는 것, 나와 다른 사람들과 공부하는 것이 무엇일지는 계속 생각해야 겠습니다.

사진만 보면 심각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만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습니다. 사진이 이리 나온 것은 제가 못 찍은 탓입니다. 크흠;;


상냥하신 현정쌤. 옆에 있는 건화형과 (피부톤이) 대비되어 환하네요. 웃는 모습이 예쁘십니다~


문명이 생겨난 이래로 인간은 편한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풍족하고 편리한 생활을 즐기게 됐지만 동시에 전쟁과 아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즉, 인간의 번뇌는 문명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채운쌤은 인간이 번뇌를 짊어진 까닭에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동·식물을 보면 그들은 본성에 맞게 살아가고 죽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본성, 자연에 부합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딱히 번뇌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번뇌가 없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습니다. 번뇌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인생이 고통스럽지만 또한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요?

채운쌤은 이반 일리치의 에피메테우스를 얘기하시면서 철학이 어떻게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고,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저는 프로메테우스가 더 끌렸는데, 왜냐하면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 결과에 맞춰서 자신의 선택을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사유의 패턴이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미래를 보고 싶다는 것은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기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또 결과가 기대와 어긋나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번뇌는 이렇게 계속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데, 채운쌤은 '시중'을 얘기하시면서 우리에게는 자신이 벌인 행위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일리치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에피메테우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래를 보고 그것에 맞춰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상자(혹은 항아리)를 열고 세상이 무도해졌을 때, 비로소 생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든 죄와 악이 상자로부터 나왔을 때, 그 안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치열하게 고민할 때, 그 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이 날 채운쌤이 각각의 에세이에 꼼꼼한 코멘트를 해주셨다면, 현숙쌤은 각각의 에세이에 열띤 토론을 열어주셨죠.
처음 오셨을 때는 아픈 모습에 걱정이 많았는데 토론이 진행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평소 보여주신 귀여운 모습은 어디 가고 대단한 집중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셨습니다. 현숙쌤에게 푹 빠져버릴 것 같습니다.
한창 토론이 진행 중인 모습입니다. 봉선쌤과 그것을 경청하고 계시는 현숙쌤 사이의 길례쌤에게 자꾸 눈길이 갑니다. ㅋㅋㅋ
팔짱 끼고 계시는 모습이 어쩐지 어울리시네요.


철학을 한다고 해서 자기 고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철학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똑같은 삶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플라톤은 동굴 비유에서 똑같은 삶에 머무는 사람들을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비유했죠. 그리고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노력하는 사람을 철학자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고 삶을 바꾸기 위한 사람입니다. 즉, 철학이란 자신의 무지, 똑같은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자기의 삶에 균열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균열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텍스트를 만나도 그것은 동굴 안에서 사람들이 그림자를 보고 시비를 따지는 것처럼 자기의 삶을 똑같은 방식으로만 반복할 뿐입니다. 채운쌤은 배움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하셨는데,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기술이 늘어간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굉장히 찔리네요.)
철학을 한다고 해서 당장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철학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자기 문제를 다르게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문제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세이를 쓸 때 해답을 내려고 하지 말고. 우선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그것을 다르게 문제화하는 과정만 밝혀도 충분하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걸 그동안 몇 번이나 얘기하셨는데 저는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네요. 하하하;;

관전포인트는 채운쌤.



저녁을 부랴부랴 먹고 바로 에세이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불태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건화형은 왜 자꾸 머리에 손을 올리는 걸까요?)


사드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읽으면 음란함보다는 온갖 추악함과 더러움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두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처한 끔직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보다 더한 것을 상상함으로서 견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비슷하게, 플라톤은 철인통치라는 이상적인 정체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 시대적 조건을 돌파하고 견디기 위해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를 읽을 때 밋밋하게 읽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플라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읽는 어떤 철학자의 사유도 공상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자신이 처한 삶을 기반으로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이토록 뜨겁고, 오랫동안 읽힐 수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면, 사서를 집대성했다고 하는 주희는 자기 마음대로 텍스트를 편집해서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인 대학의 보망장이 그것이죠. 뿐만 아니라 논어를 봐도 그를 비롯한 많은 송대 학자들이 공자를 완전무결한 인물로 만드는 듯한 느낌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사유가 의미가 없었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희는 그 어마어마한 양의 텍스트에 일일이 주석을 달았습니다. 채운쌤은 주희가 달은 주석이 어떤 지를 얘기하기 이전에, 그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공자를 보지 않았다면 그만큼 해석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철학을 탄생시켰듯이, 텍스트에 접속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텍스트에 접속하면 스무스하게 읽힐 수 없으며 충돌하는 지점이 분명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공부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글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말인즉슨, 고민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는 것이죠. 이번에 ‘왜 공부가 안되는가?’로 시작했지만 그 이전에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어야 했습니다. 채운샘은 공부도 좀 해서 아는 척 하고, 돈도 좀 있고 이런 여유 있는 모습을 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상을 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공부를 시작하면 자기 삶이 구성되는 방식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이렇게 다른 것을 하면서 공부‘도’ 하는 식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부가 안 되는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 자체가 그것만 해결되면 바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다른 게 허세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질문을 만드는 것 자체가 겉멋이고,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은 뒤풀이입니다. 에세이가 10시 반에 끝났는데 뒤풀이까지 흔쾌히 소화하셨습니다. ㅋㅋㅋㅋ
/ 혜원누나와 소영쌤의 케미를 집중해 주세요.


정말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주에는 제본해드린 파일첩에서 안토니오 네그리 1장과 5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5장 뒷부분이 제본이 안 되서 게시판에 따로 스캔해서 올려놓겠습니다.
간식은 양지연쌤과 이현정쌤. 발제는 저와 건화형입니다. 그럼 수요일날 뵙겠습니다. ^^
전체 3

  • 2017-04-24 10:07
    파티가 끝난 뒤...부터, 정작 삶은 시작된다지요.. 그날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려는 순간, 이 충격적인(?) 기호들을 만났네요~^^
    존재 자체가 이미 '솔직'일 수밖에 없는 젊은 청년들이 있어 규문이 매력있지요. 별 하나에 규창과, 별 하나에 건화와, 별 하나에 혜원과 유주...그 모든 이름들을 불러봅니다! ㅎㅎㅎ

  • 2017-04-24 10:47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 그 날의 상황과 열기가 전해지네요. 몇몇분들한테 감동적인 하루였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다른 일정때문에 참가하지 못한 저로서는 많은 것들을 놓친것 같네요.
    다음주 어떤 상황이 펄쳐질지 기대됩니다. 멋진 조장님들과 여러 선생님들 1학기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 2017-04-25 00:45
    어째 고해성사 같은 후기...ㅋㅋㅋ 문단마다 '찔리네요'ㅋㅋㅋ 그렇지만, '자기가 원하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질문을 만드는 것 자체가 겉멋이고, 욕심'이라는 말. 저도 몹시 찔리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