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숙제방

프로포절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01-05 23:46
조회
203
2017.1.5 / 소세키 프로포잘 ver.2 / 이응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개」

<주제> 소세키의 유머적 정신 태도 탐구


<제목> 예민한 자의식을 넘어, 소세키적 유머리즘



<목차>


1. 나는 유머로소이다, 신경쇠약의 덕분으로



“귀국 후에도 나는 신경쇠약을 앓았고 게다가 사람들은 나를 광인이라고 했다. ··· 다만 신경쇠약으로 광인이 되었기 때문에 <고양이>를 썼고 <양허집>을 출판했으며 <메추라기 새장>을 세상에 발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 신경쇠약과 광기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게 지당하다고 믿는다.”  - <문학론> 서, 1906


영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후로 소세키의 신경쇠약은 여전했다. 러일전쟁보다도 자기 마음 속의 병마와 싸우는 것이 더 시급했던 소세키는 다카하마 교시의 제안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게 된다.

런던 유학생활의 불쾌와 혐오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소세키가 쓴 첫 작품 <고양이>에는 도무지 신경질적이거나 암울한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작중에서 주인 구샤미가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오기는 하나, 이것이 다뤄지는 방식은 오히려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신경쇠약을 앓고 있던 소세키의 이런 유머적 정신 태도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2. <고양이>라는 해학의 창출

1> 신체적인, 너무나 신체적인, <고양이>에서 보여지는 음율과 리듬감



“나는 다시 하녀가 방심한 틈을 타 부엌으로 기어들었다. 곧 또다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내동댕이쳐졌다가 기어들었고, 기어들었다가는 다시 내동댕이쳐지고, 이 짓을 네댓 번이나 되풀이한 것 같다.(18)”

“서재에서 주인은 이 그림을 가로로 보기도 하고 모로 보기도 하면서 “멋진 색이군”했다. 일단 감탄했으니 이제 그만두는가 싶었는데, 다시 가로로 보기도 하고 모로 보기도 했다.(37)”

“ 이 집의 하녀는 안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떡 같은 걸 슬쩍 해서 먹고, 먹고는 또 슬쩍한다.(45)”

“주인은 뒤로 돌아가 보고, 뒷간에서 내다보고, 또 뒷간에서 내다보고, 뒤로 돌아가 보고, 몇 번을 말해도 같은 일이지만, 몇 번을 말해도 같은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379)”


고양이 선생이 인간 세계를 관찰한 내용은 철학적이고도 현학적인 듯하나,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은 고양이의 신체성, 구샤미의 신체성, 메이테이의 신체성을 생생히 떠오르게 만든다. <고양이> 전체에 걸쳐 살아있는 음율과 리듬! 낭송하고 싶게 만드는(?) 글인데, 실제로 소세키는 낭송을 염두해두며 一편을 썼다고.


2> 일본 전통 예술과 스턴의 찌릿한 접속, <고양이>의 구성 방식


<고양이>는 원래 1회성의 연재물로 쓰여진 것이지만, 뜻밖의 호응을 얻어 二편, 三편으로 이어지다 결국 1년 8개월에 걸쳐 연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양이>는 기승전결이나 줄거리다운 줄거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회성으로 집필한 <고양이>를 장편화하는 과정에서 소세키는 일본의 전통 예술인 ‘교겐’이나 ‘라쿠고’ 등을 활용하여, 청중의 입맛에 맞게 생략과 건너뛰기를 한다던지, 등장인물들의 느닷없는 참여와 방해가 공존하는 식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방식의 글을 쓴다.



“이 책은 취향도 없고 구조도 없고 시작과 끝이 어설프기만 한 해삼같은 문장이어서, 설사 이 한권을 내고 사라진다고 한들 전혀 지장이 없다.”  - <고양이> 상편 자서



이는 창작자이자 문학이론가이기도 했던 소세키가 <고양이>를 장편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결론으로도 여겨지지만, 한편스턴의 문학 방식을 적극 차용한 측면도 있어보인다. 영국에서 근대소설이 확립될 바로 그 시기에 이미 그것을 해체해 버리는 작품이 쓰여졌는데, 그것이 바로 스턴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였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아, 일본의 근대 문학이 확립되던 시기에 소세키가 근대문학을 해체시키는 구성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구체적으로 소세키가 일본 전통 예술에서 어떤 점을 가져왔는지 리서치

- 소세키가 접목을 시도한 근거와 스턴의 방식 리서치


3> 인간 세계의 외부자, <고양이>가 말한다


구샤미가 소세키 자신을 말한다는 것은 여러 특징을 통해 알 수 있다. 반드시 일치한다곤 할 수 없어도 겹치는 지점이 많다. 소세키가 고양이라는 설정을 통해 거리를 두고 자신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점은 소세키가 <고양이>를 쓸 무렵 노마 마쓰나에게 보낸 서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내 결점이 제일 쓰기 쉽고 어련무던해서 좋다. 남이 험담을 하기 전에 자진하여 욕을 해 두는 게 위트가 있지 않은가?”



소세키가 시도한 것은, 고양이의 눈을 빌려 해학적으로 소세키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낸 것인 듯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태도는 예민한 자의식에 갇혀 있는 자아 비판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계 외부에 있는 <고양이>를 화자로 선택함으로써, 인간 중심이라는 세계를 넘어서는 시점을 확보하고 있는 것. 소세키의 유머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소하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닌, 새롭고 자유롭고 비판적인 의식이다.

(+고양이라는 설정을 통해  자신을 거리두고 볼 수 있는 메타레벨의 시점이 가라타니 고진이 <내면의 발견>에서 말하는 ‘사생문적 태도’와 연결되는 지점)




3. 유머, 동시에 자기이고도 하고 타자이기도 한

유머적 태도가 그 자신에게는 유쾌한 것이라 치더라도, 왜 그것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에게도 쾌감을 주는 것일까? 소세키가 <고양이>와 <풀베개>에서 보이는 유머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무력한 자아를 더 높은 곳에 두려는 돗포의 태도와는 확실히 다르다. 소세키는 오히려 인물의 약점을 과장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어떤 틀에도 끼워 맞춰지지 않는 인간을 보여준다.

- (정리)소세키의 유머에 매료되었던 이유 초간단 분석 : 예민한 자의식과 유머의 상관관계 & 풍자와 해학의 차이(혹은 위트와 그로테스크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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