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시간] 위정편 4-6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07-27 23:40
조회
698
 
  1.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古者 十五而入大學 心之所之 謂之志 此所謂學 卽大學之道也 志乎此 則念念在此而爲之不厭矣

옛날에는 열다섯살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마음이 가는 바를 일러 지(志)라고 한다. 여기서 학(學)이라고 하는 것은 대학의 도다. 여기에 뜻을 둔다면 생각 생각이 거기에 있어서 그것을 함에 싫증나지 않을 것이다.

 

三十而立

서른살에 자립하였다.

 

有以自立 則守之固而無所事志矣

자립할 수 있으면 지키는 것이 일정해져서 뜻을 두는 것을 일삼을 것이 없다.

 

四十而不惑

마흔 살에 마음에 미혹됨이 없었다.

 

於事物之所當然 皆無所疑 則知之明而無所事守矣

사물의 당연한 도리에 대해서 모든 의심이 없다면 아는 것이 분명해져 지킴을 일삼을 것이 없다.

 

五十而知天命

쉰 살에 천명을 알았다.

 

天命 卽天道之流行而賦於物者 乃事物所以當然之故也 知此則知極其精而不惑 又不足言矣

천명은 천도가 유행하여 사물에 부여되는 것이니, 바로 사물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연유이다. 이것을 알면 앎이 지극히 정미하게 되어 미혹됨이 없는 것은 또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六十而耳順

예순 살에 귀가 순해졌다.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

소리가 들어오면 마음이 깨달아서 어긋나거나 거슬리는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앎이 지극하여 생각하지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從 隨也 矩 法度之器 所以爲方者也 隨其心之所欲而自不過於法度 安而行之 不勉而中也

程子曰 孔子 生而知者也 言亦由學而至 所以勉進後人也 立 能自立於斯道也 不惑 則無所疑矣 知天命 窮理盡性也 耳順 所聞皆通也 從心所欲不踰矩 則不勉而中矣 又曰 孔子自言其進德之序如此者 聖人未必然 但爲學者立法 使之盈科而後進 成章而後達耳 胡氏曰 聖人之敎亦多術 然 其要 使人不失其本心而已 欲得此心者 惟志乎聖人所示之學 循其序而進焉 至於一疵不存 萬理明盡之後 則其日用之間 本心瑩然 隨所意欲 莫非至理 蓋心卽體 欲卽用 體卽道 用卽義 聲爲律而身爲度矣 又曰 聖人言此 一以示學者當優游涵泳 不可쫕等而進 二以示學者當日就月將 不可半途而廢也 愚謂 聖人 生知安行 固無積累之漸 然 其心 未嘗自謂已至此也 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故 因其近似以自名 欲學者以是爲則而自勉 非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也 後凡言謙辭之屬 意皆放此

종(從)은 따르는 것이다. 구(矩)는 법도를 헤아리는 기구이며 모난 것을 만드는 것이다.그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저절로 법도에 넘지 않는 것은 편안히 행하여 힘쓰지 않아도 때에 딱 맞는 것이다.

정자가 말씀하셨다. “공자는 날 때부터 아는 분이다. 또한 학문을 통해 이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후인들이 나아가기를 권면하는 말이다. 입(立)은 스스로 그 도에 서는 것이다. 미혹되지 않는 것은 의혹이 없는 것이다. 천명을 아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여 본성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귀가 순해지는 것은 듣는 것에 모두 통달하는 것이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때에 딱 맞는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이와 같다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은 성인이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며, 단지 배우는 자들을 위해 모범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웅덩이를 채운 이후에 나아가고 문장을 이룬 다음에 통달하게 하신 것일 뿐이다.” 호씨는 말했다. “성인의 가르침은 또한 방법이 많다. 그러나 그 요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심을 잃지 않도록 할 뿐이다.” 이 본심을 얻고자 하는 자는 오직 성인이 보여주신 배움에 뜻을 두어 그 순서에 따라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가지 흠도 없고 모든 이치를 밝게 다한 이후에 그 일상생활 하는 사이의 본심이 밝아져서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더라도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 이는 마음이 본체요 하고자 하는 것은 쓰임이며, 본체는 곧 도(道)이고 용(用)은 곧 의(義)여서 소리를 내면 음율이 되고 몸을 움직이면 법도가 된다.” 또 말하였다. “성인이 이것을 말씀하셔서 한편으로는 배우는 자들에게 마땅히 노닐며 오랫동안 푹 젖어야 할 것이요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됨을 보여주셨고 둘째로는 배우는 자들에게 마땅히 날로 달로 진보하며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됨을 보여주셨다.“ 내가 생각건대 성인은 나면서 알아 편안히 행하여 진실로 점점 쌓아나가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마음에 스스로 이미 여기에 이르렀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일상생활 하는 사이에 반드시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므로 그 가깝고 비슷한 것들로 스스로 이름하여,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법칙으로 삼아 스스로 힘쓰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마음속으로 실제로 스스로가 성인이라고 하여 일부러 이것을 겸손하게 말한 것이 아니다. 뒤에 모든 겸사를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이런 의미이다.

 
  1.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맹의자가 효를 묻자 공자께서 어김이 없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孟懿子는 魯大夫仲孫氏 名何忌 無違 謂不背於理

맹의자는 노나라 대부 중손씨이다. 이름은 하기이다. 어김이 없다는 것은 이치에 위배됨이 없음을 이른다.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 問孝於我 我對曰 無韋

번지가 말을 몰자 공자께서 그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맹손이 나에게 효에 대해서 묻자 나는 어김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樊遲 孔子弟子 名須 御 爲孔子御車也 孟孫 卽仲孫也 夫子以懿子未達而不能問 恐其失指而以從親之令爲孝 故 語樊遲以發之

번지는 공자 제자로 이름은 수다. 어(御)는 공자를 위해 수레를 몰았다는 것이다. 맹손은 중손씨이다. 공자께서 맹의자가 미처 이해하지 못해 질문을 못하니, 그 본뜻을 잃고 부모의 명령을 따라는 것을 효로 여길까 걱정하셨다. 그래서 번지에게 말씀하셔서 그 뜻을 핀 것이다.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번지가 말했다. “어떤 말씀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살아계시면 예로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 장사지내고 예로 제사 지내는 것이다.”

 

生事葬祭 事親之始終具矣 禮 卽理之節文也 人之事親 自始至終 一於禮而不苟 其尊親也至矣 是時 三家僭禮 故 夫子以是警之 然 語意渾然 又若不專爲三家發者 所以爲聖人之言也

胡氏曰 人之欲孝其親 心雖無窮 而分則有限 得爲而不爲 與不得爲而爲之 均於不孝 所謂以禮者 爲其所得爲者而已矣

살아 계실 때 섬기는 것,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처음과 끝을 갖추는 것이다. 예는 이치의 끊어놓은 문(文)이다. 사람이 부모를 섬기면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예에 있어서 한결같이 하며 구차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를 높이는 것이다. 당시 세 가문이 예를 참람하였으므로 공자께서 이로써 경계하신 것이다. 하지만 말씀하신 뜻이 원만하며 또한 오로지 세 가문만을 위해 말씀한 것은 아니므로 이 때문에 성인의 말씀이 된다.

호씨가 말하였다. “사람이 그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비록 끝이 없으나 분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할 수 있으나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데 하는 것은 불효라는 점에서 똑같다. 이른바 예로 한다는 것은 그 할 수 있는 것을 할 따름이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憂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의 병을 걱정합니다.”

 

武伯 懿子之子 名彘 言父母愛子之心 無所不至 唯恐其有疾病 常以爲憂也 人子體此而以父母之心爲心 則凡所以守其身者 自不容於不謹矣 豈不可以爲孝乎 舊說 人子能使父母 不以其陷於不義爲憂 而獨以其疾爲憂 乃可爲孝 亦通

맹무백은 맹의자의 아들이며 이름은 체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르지 않는 데가 없으나 오직 그 질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항상 걱정으로 삼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식이 이를 본받아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그 몸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 삼가지 않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효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말에 자식은 부모로 하여금 그 불의에 빠지는 것을 근심으로 삼게 하지 않고 오직 그가 아플까를 근심으로 삼게 함을 효라고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역시 통한다.

 

공자님의 자서전과 함께 효 시리즈가 이어졌던 시간이었습니다~

‘~로 삼다’ 라는 말은 자꾸 걸리네요. 뭔가 명사화 하지 않으면 어쩐지 말이 구구절절 길어지고ㅠ

‘절문(節文)’이라는 말도 그냥 절문!! 하고 말아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너무 딱딱한거 같고. 계속 봐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걸 깨달게 됩니다^^;;

 

다음 시간 간식은 오영쌤입니다

 

다음 시간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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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7-28 19:06
    우워 이렇게 놓고보니 우리 배운게 엄청 많은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