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1학기 1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17-02-17 19:34
조회
376

절탁Q 첫 번째 시간은 플라톤의 『국가‧政體』 1권과 『편지들』의 플라톤의 7번째, 8번째 편지와 생애를 읽고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각 조에서 『국가』 1권 발제를 해온 분들의 글을 읽고 조별토론이 이루어졌는데요. 저희 조는 혼, 프쉬케가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혼의 좋은 상태가 곧 좋은 삶이 아닌가 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는데요. 몇몇 문장은 다시 읽어보면서 서로 어떤 해석을 했는지 비교도 해보았습니다.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문장도 함께 읽으니 낯설게 보이는 효과도 경험했구요.^^ 핵심이 되는 포인트를 잡고 그걸 추상화해내는 게 철학책의 정리라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지만 이건 앞으로 많은 훈련이 필요할 듯합니다.

채운샘은 소크라테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소피스트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셨죠.

소피스트의 활동시기는 페르시아 전쟁기를 거치며 강자로 부상한 아테네의 민주정시대, 비극의 시대이자, 역사라는 기록적 문화가 생성된 시대이기도 했죠. 소피스트들은 이런 시대의 새로운 지식운동가이자 최초의 사교육자들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지식을 팔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흉으로 플라톤에게 궤변론자로 맹공을 받거나 절대적 가치를 논하지 않아서 상대주의자라고 폄하되기도 하지만, 니체의 경우 소피스트들의 논리를 궤변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논리를 부정한 점에서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전의 것들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을 벗어나서 각자의 견해를 논리를 가지고 개진하는 자유로운 교육을 펼쳤다는 점이나 지식에서 전통을 가져오는 걸 배척했고 신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겹치는 부분도 있구요.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가치를 가지고 현실을 살아가는지 얘기한 철학자들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의 참된 것 옳은 것을 추구했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를 소피스트로 내세워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단순한 자기 의견, doxa에 불과하다고 논파하지요. 이런 플라톤의 무시와 비판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소피스트들은 역사에 남을 수 있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졌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의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소크라테스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소크라테스이냐에 따라서 다르게 묘사가 되는데요. 저는 그 모든 모습이 다 소크라테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념에 잠겨서 꼬박 밤을 새우고 유유히 사라지는 산발의 뒷모습이 그려집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질문을 통해 답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었다는 자각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죠. 무지를 자각할 때 알아야 되겠구나 철학을 해야겠구나 스스로 깨닫게 된다고 보구요. 산파술은 자기의 앎이 참된 앎이 아니라 단순한 자기 생각, 개인적 의견 doxa에 불과하다는 무지의 무지를 깨게 만듭니다. 즉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상대의 무지의 무지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알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가 역전된 상황이 일어나고 이를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산파란 사람들이 스스로 철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자들이지 답을 주는 자가 아닙니다.

플라톤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영혼돌봄’ care your psyche 인데요. 제겐 참 돌봄이라는 단어가 뭐랄까 강렬하게 느껴지더군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자면 혼을 돌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죠. 혼이란 숨을 뜻하는데요, 정신,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게 영혼이란 인간의 신체에 깃들어 있는 혼이면서 이성과 욕망 그리고 기개(실행하는 힘, 의지) 이렇게 세 가지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룬 상태가 혼의 최고의 상태구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자기 혼을 돌본 자라고 봅니다. 자기 혼을 돌보지 않는 자들은 바깥에서 자기를 치장해주는 것(돈이나 명예, 외모)을 돌보는 자들이죠. 심히 찔리는 부분입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지점이죠. 내 것도 아닌 것을 돌보며, 원한다고 되지도 않는 일에 매달려서 스스로 번뇌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제 모습이 보이네요. 자기 뜻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신경쓰는... 아,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이건 진정 아는 게 아니었겠지요.

북송시대 소강절이 말한 안분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는 일 뿐 고기가 얼마나 잡히느냐는 내 몫이 아니지요. 그걸 추구하는 건 욕심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역시나 알지 못했나 봅니다. 뿐만 아니라 안다고 생각하고 모른다는 걸 몰랐으니 정말 doxa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해야겠지요.

자기돌봄 자기배려 자기에게 좋은 것을 배려하는 자는 결국 타인도 배려할 수밖에 없다. 니체나 푸코가 고대 철학에 주목했던 이유를 더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적어도 그리스도교 이전의 철학에선 내가 나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자기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모순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고 했던가요. 플라톤도 여러모로 아이러니한 삶을 보여줍니다. 비극작가가 꿈이었음에도 비극을 극장 정치라고 비난하고, 시의 위험성을 지적했으나 자신은 대단한 언어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나, 음성언어로 발화된 대화를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로 기술된 대화편을 썼다는 점 등 말입니다.

동양의 맹자처럼 가장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글쓰기를 했다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유머와 풍자 아이러니가 숨어있다고 하는데 아직 그 참맛을 느끼기엔 부족하네요.

플라톤은 세 가지 질문을 계속하고 있는데요. 첫째 ‘좋음이란 무엇인지’ 이데아에 대한 인식론, 둘째 인간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존재론, 셋째 존재가 최선의 상태를 이루면서 살아가려고 하면 어떤 국가가 필요한지에 대한 정치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문제 제기 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개념 규정의 문제인데요.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뭐랄까 막막함 이런 것을 느끼면서 대답하기가 힘들어지는데요. 절대적인 하나를 묻기 때문에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편이 답 없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이해가 되죠. 우리가 뭐라 정의할 순 없지만 그것 자체는 있다. 이게 이데아론의 근거죠. 올바름 자체 아름다움 자체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 올바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현상을 부정하진 않지만 본질과 현상에 위계를 설정하는, 결국 ‘~한 존재는 ~한 본질을 갖고 있기에 꼭 ~해야 한다’는 본질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 ‘무엇이 나인가’라는 구체적 물음에는 답을 할 수가 있죠. 내가 경험하고 해석한 것이 뭐냐는 질문이기 때문이죠. 니체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한 사람이지요.

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플라톤의 텍스트를 관통하는 주요한 질문입니다.

개인의 삶의 의미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품고 그 답을 추구해가는 과정 이게 곧 영혼을 돌보는 것이며 철학하는 삶이죠. 철학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영혼의 내적변화를 추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양식이 되죠. 철학이 곧 생활양식입니다.

플라톤의 ‘전향’, ‘개심’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돌보는데 전념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 자기의 영혼을 돌보는 삶을 살게 되는 즉 철학을 하게 되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철학자는 무지한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상태에서 깨어나서 앎 자체인 신을 향해 걸어가는 중간에 있는 자로 묘사되죠. 인간을 떠나려고 하지만 신은 아닌 자. 언제나 방황하는 자로서 말입니다. 철학은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지혜를 훈련하는 것이고 그 지혜로운 과정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하나뿐인 양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철학이죠. 푸코는 이걸 ‘실존의 미학’이라고 말합니다.

중세철학도 자기의 실존 문제를 바꾸는 문제가 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 자기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문제가 철학에서 실종됩니다. 인식의 문제가 독립해버림으로써 아는데 실천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 간극이 생겨버립니다. 현실에서 제가 많이 부딪쳤던 문제인데요. 앎과 삶의 불일치 이게 저를 공부의 길로 들어서게 한 명제이기도 했거든요. 안다와 산다가 일치된 삶이 지금의 우리에겐 낯설 뿐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론 몹시 부럽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명쾌한 삶인지요. 우린 여러 가치들이 있을 때 어떤 것이 옳은가를 질문합니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말한 대로 사는 그들은 누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가 일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를 결정합니다.

저는 왜 『국가』 1권이 올바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었는데요. 채운샘은 플라톤은 왜 올바른 것 참된 것을 꿈꿨을까 질문하시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도할 때 인간이 갈 수 있는 극단적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무도한 게 세상이구나, 무도한 것밖에는 없다는 걸 힘들지만 치고 나가는 것이지요. 어떤 세상도 꿈꾸지 않는 루쉰처럼. 또 한 가지는 무도하지 않은 것을 꿈꾸는 것이죠. 분명 플라톤에게도 무도한 세상이었을 겁니다. 아테네의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에 살았던 그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의 정치적 실천은 좌절되는 상황에서 초월을 갈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부정적으로 보여지는 현실에서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이상을 제시했던 플라톤이 사실 많이 이해됩니다. 제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것도 망상이고 자기 정당화만 안 해도 된다는 샘 말씀에 뜨끔합니다.

8주 동안 플라톤주의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 듯 느껴집니다. 뭐라 애증이랄까요. 내 안에 플라톤이 많아서 괴롭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제가 오해하고 있었던 면도 많았던 듯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역시나 doxa에 빠져있었다는 무지의 무지를 자각합니다. 무지와 공허를 발견한 자만이 그걸 채우려는 욕망에 철학에 이끌린다고 했으니 준비는 된 듯하지요. 샘 말씀처럼 플라톤을 만났으니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찐하게 겪어봐야겠습니다.^^
전체 2

  • 2017-02-18 19:10
    매번 토론할 때마다 무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현정쌤 말씀대로 혼자 읽을때 적당히 이해했다고 넘긴 문장도 함께 읽으니 전혀 다르게 보이는...! 서로의 산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ㅎㅎ;

  • 2017-02-19 16:55
    '철학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무엇이다!'라는 식으로밖에 생각이 안 떠오르네요.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무엇이다'는 사고의 틀을 깨버리는 것, 자신의 무지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게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은 쉽게 내뱉어도 내가 사실은 독단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기가 쉽지 않네요~ 우선 플라톤과 찐한 관계를 맺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