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3.27 세미나후기

작성자
仙花
작성일
2017-03-29 20:11
조회
271
<반시대적 고찰Ⅰ> 두 번째 시간.

‘동학의 존재’의 힘!을 느꼈다. 혼자 읽으면서 내용도, 번역 문장 자체도 이해하기 어려워 고통스럽던 때가 흡사 ‘노새나 찾을 수 있는 안개 속의 길’에 선 것과 같다고 한다면, 함께 읽고 토론한 자리에서 동학들의 도움으로 미지 혹은 무지의 상태를 다소 벗을 수 있게 된 때는 비 그치고 무지개 선연한 아침과 같다고나 할까.(이런 비유, 니체한테 욕먹기 딱 좋겠죠?ㅋ) 발제를 하면서 ‘에고에고,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공부를 계속해야할지 말지를 고민하느라 불편함과 불쾌함에 부대끼던 그때와 지금은 너~무 다르다. 스스로 같은 사람인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그때 그 불쾌함을 느끼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생산적인 진짜문화 속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아래 ‘생산성’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ㅎ

8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저술가 슈트라우스’의 속물성에 대한 니체의 고발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몸(마음)이 찔리는 듯한 느낌을 호소했다. 니체의 비판은 슈트라우스 한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최종목표는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해있던 속물문화였다. 니체는 그 속물문화의 중심에 있는 슈트라우스를 주목했고 그의 저작 “옛 신앙과 새로운 신앙”을 속물문화의 복음서라 이름하면서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우리의 논의는 먼저 ‘생산성’이라는 것에서 시작했다. 여기서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니체가 말한 ‘생산적인 모든 것은 불쾌감을 유발한다’에서 생산성은 진짜문화의 속성이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사유의 방식을 깨지는 데서 불쾌감이 유발되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불쾌감의 결여는 ‘소비적이고 기존의 것에 만족하고 기존의 것에 길들여지는 것’일 뿐이며 그런 일체의 것은 소용없다고 말한다고 한다. 여기서 니체가 현대성의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의 현대는 더 많이 동질적 소비적인 사회가 돼버렸다. 이렇게 우리와의 관련성을 인식하면 이 책이 좀더 흥미롭게 읽힌다고. 한 동학은 고백했다. ‘처음 공부하면서 나의 책읽기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나와 다른 것들을 발견하게 될 때가 진짜 읽기인 것 같다. 그래, 맞아! 하면서 읽는 건 그냥 자기확인에 불과할 뿐 이때 책읽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또다른 동학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게 바로 생산적인 것이겠다. 들뢰즈를 읽으면서 그런 경험을 했다. 그 책의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나에게 기존의 틀을 깨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고 새로운 다른 것을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그래서 ‘생산적인 모든 것은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오늘날 신문의 칼럼 같은 글쓰기를 보면 그들의 글은 항상 표준적인 것을 쓰고 결론은 항상 똑같다. 니체가 비판하던 당시의 속물교양과 다르지 않은 글쓰기 방식이다.

‘불쾌감’이라는 말을 폭력이라는 말과 관련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폭력적인 것은 나쁘고 평화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통념인데, 니체는 견고하게 평화가 유지되는 속에서 뭔가가 생산될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것 같다.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논의를 한다는 것일 테고, 기존의 구도 안에서 뭔가가 얘기될 때는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생산성은 평화를 깬다는 의미에서 폭력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폭력에 대한 우리의 통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생산적인 것을 260쪽에서는 ‘불쾌감’이라는 부정적인 말로 설명하고 있다면, 261쪽에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즉,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을 ‘힘센 것, 비상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 했다. 이런 것들과 접촉했을 때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더불어 니체가 265쪽에서 말하고 있는 ‘건강(강함, 탄탄한 체격, 열렬한 운동의 힘, 근육 운동의 다양함과 부드러움)’이라는 것이 바로 ‘힘센 것, 비상한 것, 아름다운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닐까. 한편, 우리사회 ‘건강’ 신드롬은 니체가 말하는 그것과는 다르다. 단지 좋은 것 많이 먹고 오래 사는 것(길게 연명하는 것) 정도로밖에 상상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속물적이라 할 수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고민없이 그냥 현재에만 몰두하고 소비만 있는 삶이다.

언어에 대한 자각을 니체는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사유를 언어로 하는데, 언어에 민감하지 않으면 결국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말하려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슈트라우스의 문체를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능력이 없다는 것을 넘어 그가 제대로 된 사유를 한 적이 없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도 니체가 현대성의 철학자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현대철학자들은 언어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니체는 이미 그때 그런 경향(언어표현의 문제 언어와 사유의 문제)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가 곧 언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독창적인 언어 없이 새로운 사유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언어자체에 대한 니체의 사유도 인상적이었는데, ‘언어는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상속재산이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내 것이 아니니 잘 모르면 사전이라도 찾아봐라’라고 하는 것에서 니체의 언어에 대한 엄격성과 예민함을 느낄 수 있다. 니체는 룸펜은어(놀고먹는 사람들의 자기들끼리의 언어)를 비판하는데, 이또한 생산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속물언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언어와 함께 비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비유란 모름지기 의미전달을 명료하게 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정확하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의 비유는 종종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거나, 현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해 의미상 유연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빗대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한편 누군가 니체가 쓰고 있는 비유에서는 ‘이게 뭐야’보다는 ‘정말 이런 비유가 가능한가’와 같은 경탄이 있었다고 고백하면서, 그것은 아마도 비유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그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를 놓는totum ponere 예술가의 힘’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이것은 글쓰기에 대한 니체의 비유로서 건축술에다 글쓰기를 빗댄 것이다. 훌륭한 저술가는 이 전체를 구성하는 또는 조망하는 예술적인 힘으로 신전이나 주택을 건축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슈트라우스는 단지 정원 하나 만들 수 있을 뿐이고 그래서 그는 결코 천재적인 저술가, 훌륭한 저술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슈트라우스가 책의 목차를 구성한 것에서 니체는 그가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하는데, 그의 책 제목 “옛 신앙과 새로운 신앙”에서 쓰고 있는 ‘신앙’이라는 말에서도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이것은, 인식적 학문적 진리를 말하는 자리에서 곧잘 종교적인 신앙으로 넘어가버리는 인간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다. 그것은, 신앙은 진위를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학문적 진리에 근거해서 ‘그 신앙은 이상하다, 틀렸다’라고 하는 것이며, ‘우파가 왜 옳으냐’라고 했을 때, 답을 해가다가 마직막엔 ‘내가 믿기 때문에 옳다’라고 말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슈트라우스가 ‘신앙’이라 표현한 자리에 우리가 아는 그 신앙은 없다. 그것은 그가 학문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을 혼동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이또한 그에게 사유의 엄격성이 없다는 걸 증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우리의 책 제목 중 반시대성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본래 독일어 ‘Unzeitgemäße’는 ‘시대에 맞지 않는, 또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니체의 속물문화에 대한 비판은 실로 반시대적이다, 그 시대는 속물문화의 시대였으며 여기에 니체는 반대의 깃발을 높이 올렸으니. 한편, ‘반시대성’은 그 시대의 트랜드에 맞서 묻기, 질문하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질문을 안 하는, 질문을 못 하게 하는 시대가 곧 니체의 (독일)속물시대라면, 그것은 변화를 꺼리고 생산적인 모든 것의 불쾌감을 견딜 수 없어하는 우리 시대는 어쩌면 더 심한 속물의 시대가 아닐까.

발제를 하는 내내, 비판을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매력적인 니체의 독설에 마음을 뺏겨, 니체가 제시하는 팩트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강건너 불구경일 수만은 없는 심정이기도 했는데, 그건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하는 어느 시인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렸기 때문이다. ‘혀가 자갈처럼 딱딱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 하는 부끄러움,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 무덤속의 벙어리, 막대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그 북어..... 아무튼 먼 여행이 될 것 같지만, 앞으로도 계속될 니체가 주는 불쾌감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할 것을 마음먹어본다.
전체 4

  • 2017-03-30 00:18
    와우! 우리가 이런 얘기를 나누었었나요? 후기의 필요성이 확 느껴집니다. '너도 북어지!' 앞으로 니체로부터 계속 듣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 2017-03-30 12:50
    오오오ㅡ 그날의 토론에서 거론된 모든 얘기들이 완전 꼼꼼히 정리되어 있네요!!! 편하게 술술 읽히는 책만 읽던 저에겐 안읽히고 어렵고 불편한 니체의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 자체가 훈련인 것 같아요. 안개 속을 헤매는 노새라는 말에 뜨끔하고서 보니, 거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니체에게 욕먹을 일 투성이네요.

  • 2017-03-31 10:08
    토론이 여기 그대로 옮겨져 있네요! 꼼꼼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반시대성이라는 말이 2,3권을 읽으며 어떻게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기대되네요.

  • 2017-04-03 02:14
    와~~ 대단하십니다. 토론 시간에 오간 내용을 아주 잘근잘근 써주셨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도움을 받도 물러갑니다^^
    그래서 니체는 매번 다음 시간이면~ 뭔가 가닥이 잡히려나~ 하는 생각을 심어주는 군요!
    역시 모르는 것은 똑깥은데도요^^ 물론 이건 저의 경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