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6.19 격몽스쿨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06-15 23:30
조회
3613
<공자, 최후의 20년>을 읽고 나서 대개 드는 생각은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봤다는 것입니다. 제자들한테 하는 말이랑 행동이 다르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늘 올곧고 깨끗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고집은 또 엄청 부리립니다-_- 시라카와 시즈카는 반체제 인사로 공자를 읽었지만 <공자 최후의 20년>을 읽고 나면 인간적인, 그리고 고집센 공자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후의 20년'이라는 제목을 붙인 만큼 결국 자기를 알아주는 세상이 아닌 것을 절감하고 비애를 느끼는 모습을 강조한 책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거기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공자를 부각하기도 했지요. 정치적인 이상은 드높기에 현실과 불화하는 공자, 그리고 제자들과도 불화하는 공자, 하지만 어느 순간은 자로가 경악하며 뜯어말릴 정도로 현실 정치에 발을 디뎌볼까 하고 그다지 깨끗하지 못한 입구를 기웃거리는 공자. 모두 <논어>에 나온 공자의 모습이지만 작가가 유독 강조하니 또 그렇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정말 해석하기 나름인 인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직접 자기가 저술한 책이 아니라 <논어>의, 제자들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만 남았으니까요.

채운쌤은 우선 '인간적'이라든가 '이상적', '현실적'이라는 말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것은 서툴고 비루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고 이상적이라면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론에 빠지는 것이며 또 현실적이라고 한다면 사회생활을 똑부러지게 하는 한편 시류에 매몰되는 그런 모습일 때 흔히 사용하지 않던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상태라는 것은 사실 '~하면 ~할 수 있다' 라고 조건을 붙여서 미래태, 완성태입니다. 흔히 이상론을 관념론이라고 할 때 '이상'이라면 이런 개념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럼 공자는 어떨까요? 공자는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시키고 하는 인물이었지만 이상태를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주공의 세계는 도가 실현된 세계이지만 자기가 사는 세계에 옛 주공의 문물을 끌어오겠다는 다짐의 표현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공자가 말하는 주공의 문물이라든가 정명正名이라든가 하는 것은 듣기만 하면 추상적인 개념이라서 과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는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공자는 '아비는 아비답게, 군주는 군주답게'라고 말했지만 그 당시는 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였으므로, 실상 공자가 말하는 아버지와 군주가 과연 어떤 모습인지는 당시에서 확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였기에 공자는 정명론을 말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표상과 현실에 간극이 없도록 할 것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자가 공자였으니까요. 그러므로 공자는 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공자가 보기에 표상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나 큰 것이었으니까요. 공자는 그래서 당시의 개념을 다시 정립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개념이란 사실 공자가 이러저러하다~ 라고 말해서 그 의미가 붙여진 것이랍니다. 예컨대 군자는 당시 지배계급이라는 의미였지만 <논어>에서는 자기를 수양하고 덕을 갖춘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을 지금에 와서는 마치 원래 그랬던 것인양 쓰고 있으니, 공자가 꿈꾸던 표상과 현실이 일치하는 세계는 아직도 멀었는지 몰라도 그의 이상만큼은 이제 보편적인 개념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상 공자가 해석한 현실, 공자가 구성한 현실이 지금은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인양 굳어졌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공자는 세상을 주유하다가 쓰이지 못하고 노나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되지 않으면서도 행하는 자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공자는 본인을 일컬어 '가함도 불가함도 없는 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건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자는 되든 안 되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현실에 펴는 사람이었는데요. 채운샘은 불혹의 혹惑이 어떤 것이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하는 것을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40에 이르러 혹하지 않았습니다. 즉 세상에 받아들여지든 그렇지 않든 우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 그래서 자기를 만족시키는 것을 좇는 자가 공자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자의 최애제자(!) 안회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전까지는 안회가 그저 공자의 이쁨받는 모범생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생각해보면 안회는 <논어> 저술에 관여하지 못하고 공자보다도 빨리 죽었지요. 즉 공자의 말 속에만 남아 있는 인물입니다. 단사표음 한다든가, 문일지십 한다든가, 전부 공자의 말 속에서만 살아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번 <최후의 20년>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세 제자와 공자가 한 도에 대한 논쟁에서 유일하게 질문 아닌 대답을 한 제자이기도 하고요. 채운샘은 공자를 넘어갈 수 있는 자였으므로 그의 희망이기도 하고, 또 공자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그의 불운이었다고 하셨고요. 저는 그가 공자가 갖는 어떤 추상적인 이상을 언어화 해준 인물이라서 중요한 제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공자가 안회를 언급하며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던 게 아닌가 싶고요. 이번 <논어> 읽는 시간에는 안회가눈에 많이 들어올 것 같아요~


이번 시간에 읽은 <논어> 부분입니다



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수시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學之爲言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說 喜意也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 其進自不能已矣 程子曰 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 又曰 學者 將以行之也 時習之 則所學者在我 故 悅 謝氏曰 時習者는 無時而不習 坐如尸 坐時習也 立如齊 立時習也

학(學)이란 말은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은 먼저 하는 자와 나중에 하는 자가 있다. 나중에 깨닫는 자는 반드시 먼저 깨닫는 자의 것을 본받아야 선을 밝혀 그 처음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습(習)은 새가 자주 나는 것이다. 배우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마치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다. 열(設)은 기뻐하는 뜻이다. 이미 배우고 또 수시로 그것을 익힌다면 배운 것이 익숙해져서 중심에 기쁨을 느껴 그 나아감을 스스로 그칠 수 없다. 정자가 말씀하셨다. “습(習)은 거듭 익힌다는 것이니, 수시로 다시 생각하고 연역하여 속을 흠뻑 적시면 또한 기쁜 것이다.”또한 말씀하셨다.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시로 그것을 익힌다면 배운 것이 나에게 있으니 그러므로 기쁜 것이다.”사씨가 말하였다. “수시로 익힌다는 것은 때마다 익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앉음은 시동이 앉아 있는 것과 같아, 앉아서 수시로 익히는 것이며 서는 것은 제계하는 것과 같아 서서 수시로 익히는 것이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곳으로부터 동지가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朋 同類也 自遠方來 則近者可知 程子曰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 可樂 又曰 說 在心 樂 主發散 在外

붕(朋)은 같은 류(類)이다. 먼 곳에서부터 온다면 가까이 있는 자들도 알 수 있다. 정자가 말씀하셨다. “선을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므로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또한 말씀하시길 “열(設)은 마음에 있고 락(樂)은 주로 발산하므로 외부에 있다.”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溫 含怒意 君子 成德之名 尹氏曰 學 在己 知不知 在人 何溫之有 程子曰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 愚謂 及人而樂者 順而易 不知而不溫者 逆而難 故 惟成德者能之 然 德之所以成 亦由學之正, 習之熟, 說之深而不已焉耳

程子曰 樂은 由說而後得 非樂 不足以語君子

온(溫)은 성냄을 품은 뜻이다. 군자는 덕을 완성한 이의 명칭이다. 윤씨가 말하였다. "배움은 자신에게 달려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음은 남에게 달려 있다. 어찌 서운할 것이 있겠는가. 정자가 말씀하셨다. "비록 남에게 미치는 것을 즐거워해도 옳다고 인정받지 못해도 서운함이 없어야 소위 군자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컨대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 순리이므로 쉽지만 알아주지 않는데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므로 거스르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오직 덕을 이루는 자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덕이 이루어지는 것은 또한 배움이 바르고 익히는 것을 익숙하게 하고 기뻐하는 것을 깊이 하여 그치지 않는 것을 말미암을 뿐이다."

정자가 말씀하셨다 "즐거움은 기쁨을 말미암은 연후에 얻어지는 것이니 즐겁지 않고서는 군자라고 할 수 없다."


다음 시간에는

<논어> 목차 외워 옵니다.

맡은 부분 해석 해 오시고요~

간식은 민호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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