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차탁마Q 4.5 후기 + 에세이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4-09 18:59
조회
205
『국가』의 10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저는 그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예술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우선 ‘플라톤은 예술론을 어떻게 보고 있나’라는 관점보다는 ‘시뮬라크르를 어떻게 보고 있나’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기에 용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이 예술 자체에 대해서 논한다기보다는 예술에 대해서 학문의 우위를 정초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이것은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예술론이라기보다는 플라톤의 커다란 철학적 기획(?) 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10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었다고 말하죠. 이는 아마도 아테네의 주요 미디어와 같은 역할을 해왔던 서사시-서정시-비극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문제 삼고, 그에 맞서 철학이 삶에 갖는 지위를 정립하고자 했던 플라톤의 눈에 비친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어째서 시를 비판하고 철학을 그 위에 세워야 했던 것일까요? 시가교육과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을 살펴보면 플라톤은 이것들이 대중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대중의 여론을 선동하는, 일종의 극장정치로 보았던 것이죠. 시는 감정을 건드려서 민중들의 괴로움을 분출하게 만들지만, 철학은 이성-로고스를 자극하여 그것을 조절하게 만든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성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지혜(기지)와는 상이한 것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보여주는 지혜가 상황 속에서 발휘되는 순간적 판단력 같은 것이었던 반면 플라톤이 주장하려는 앎은 변함없는 것에 대한 앎이죠. 플라톤은 이 모든 것을 변하지 않는 본과의 관계 속에서 위계 짓습니다. 시는 변화하는 것을 포착하는 반면에 플라톤의 철학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상대합니다. 서사시는 그리스인들에게 운명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면, 플라톤은 운명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실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강조하죠. 삶의 고통을 ‘신의 놀이’로, 자신들이 어찌할 수도 없고 명확히 알 수도 없는 문제로 치부했던,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실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말한 플라톤은 굉장히 반시대적인 인물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사시적 전통 안에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운명 속에서 명예롭게 살기’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헥토르처럼 명예롭게 행동할 것인가! 인간의 수동적 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는 운명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능동성의 표현이었던 것이겠죠. 이에 비해 플라톤은 어떻게 파토스, 격정이 아닌 지성, 평정과 관계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아테네 교육을 재정비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운명의 몫’을 받아들일 것을 가르친 떠돌이 시인들의 시대에서 아카데미아를 설립하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진을 촉구한 정착적 지식인의 시대로의 이행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는 여기에서 그리스적 건강의 훼손을 보았지요. 니체는 세계의 진상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은 소크라테스의 낙천성에서 삶으로부터의 도피, ‘진리에 대한 하나의 멋진 정당방위’, ‘비겁함과 거짓’, ‘교활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이미 태어났다면 죽는 것이야말로 차선이라고 말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비극문화로부터 삶에 대한 강한 긍정, ‘강함의 염세주의’를 이끌어냅니다. )

소크라테스는 10권에서 제작을 세 층위로 구분하며 예술을 비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사용자와 제작자, 모방자를 제작에 대해서 구분하고 있는데, 채운샘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머지 둘과 모방자를 구분해내는 일입니다. 사용자와 제작자는 본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해내는 사람들인 반면에 모방자는 본과 무관하게 생산하는 자들이죠.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고 떠듭니다. 플라톤 철학의 구도는 바로 이러한, ‘본 없이 생산해 내는 것들’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 된다고 합니다. 본과의 관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들 사이에는 정확한 위계를 성립시킬 수 있지요. 본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들은 질서를 부여 받게 될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질서의 내부가 아니라 질서의 외부, 질서 자체를 거부하는 것들입니다. 시뮬라크르, 즉 본 없이 존재하는 것. 이것들은 모든 체계를 어그러뜨리고 가상과 실재 사이의 위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플라톤이 예술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시뮬라크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예술 비판은 바로 이러한 ‘본 없이 생겨나는 것들’, ‘정의와 닮지 않은, 닮으려고 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첫 에세이입니다. 이제 10일 남았네요. 채운샘은 5~6페이지 안에서 제기할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풀어내라고 하셨습니다. 음... 어떻게 될지ㅠㅠ.

에세이 일정을 공지하자면, 우선 12일까지 서론과 개요를 숙제방에 올려주시고, 18일 밤 10시까지는 완성된 에세이를 올려주시면 됩니다. 10시까지 올리지 않으실 경우 벌금은 무려 5만원입니다(!)

에세이 이후 일정을 공지하자면, 에세이 다음 주인 26일엔 곧바로 2학기를 시작합니다. 원래 에세이 다음 주에 예정되어 있던 휴일은 연휴인 5월 3일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에세이 당일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10시까지 오시되, 연구실 복사기로 에세이를 출력하실 분들은 순서가 밀릴 수 있기 때문에 조금 여유롭게 오셔야 합니다.

그럼 19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7-04-09 21:47
    에효...... 한숨만 나오네요. 좀 알 것 같다가도 잘 모르겠고. 에세이 준비 과정을 정리의 시간으로 삼아야겠죠? 아직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1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