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몽스쿨

[격몽복습시간] 술이 30~37(끝)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7-04-18 22:48
조회
174
30. 陳司敗 問昭公 知禮乎 孔子 曰知禮.

진나라의 사패가 물었습니다. 소공이 예를 알았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를 알았다.

 

陳, 國名, 司敗, 官名, 卽司寇也, 昭公, 魯君, 名, 稠, 習於威儀之節, 當時, 以爲知禮故, 司敗,以爲問而孔子, 答之如此,

진은 나라이름입니다. 사패는 관직명, 즉 사구입니다. 소공은 노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주인데, 일련의 상황에 따른 예의범절에 익숙해서 당시에 그가 예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패가 묻자 공자께서 이와 같이 대답하신 것입니다.

 

孔子 退 揖巫馬期而進之曰吾聞君子 不黨 君子亦黨乎 君 取於吳 爲同姓 謂之吳孟子 君而知禮 孰不知禮.

공자께서 물러가시자 (사패가) 무마기에게 읍하여 나오게 하고(2. 나아가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군자는 편당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당을 짓는가? 임금(소공)께서 오나라에 장가 들었으니 성이 같으므로 (그 여자를) 오맹자라 했다.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하겠는가.

 

巫馬, 姓, 期, 字, 孔子弟子, 名, 施, 司敗, 揖而進之也, 相助匿非曰黨, 禮, 不取同姓, 而魯與吳皆姬姓, 謂之吳孟子者, 諱之, 使若宋女子姓者然,

무마는 성이고 기는 자이며,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시입니다. 사패가 읍하여 그를 나오게 했습니다. 서로 도와주며 잘못을 숨겨주는 것을 당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예에서는 같은 성씨엔 장가들지 않는데 노나라와 오나라는 모두 ‘희’라는 성을 썼습니다. 오맹자로 일컬은 것은 그것을 피한 것(숨긴 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송나라 여자의 성인 것처럼 여기게 한 것입니다.

 

巫馬期 以告 子 曰丘也 幸 苟有過 人必知之.

무마기가 그 내용을 고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행운이구나. 진실로 내가 잘못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아는구나.

 

孔子, 不可自謂諱君之惡, 又不可以取同姓, 爲知禮故, 受以爲過而不辭,

공자께서는 스스로 군자의 잘못을 숨긴 것이라 말하라 수도 없었고 동성을 취한 것으로 예를 알았다고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 지적을 받아들여 잘못이 있다 하시고 구구절절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吳氏, 曰魯, 蓋夫子父母之國, 昭公, 魯之先君也, 司敗, 又未嘗顯言其事, 而遽以知禮爲問, 其對之宜如此也, 及司敗, 以爲有黨, 而夫子, 受以爲過, 蓋夫子之盛德, 無所不可也, 然, 其受以爲過也, 亦不正言其所以過, 初若不知孟子之事者, 可以爲萬世之法矣,

오씨가 말했습니다. 노나라는 선생님의 부모의 나라이고 소공은 노나라의 전 임금이었습니다. 사패가 또한 그 일을 드러내서 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예를 아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대답한 것이 마땅히 이와 같았는데 사패가 당을 짓느냐고 말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선생님이 그것을 받아들여 잘못이라고 여기셨습니다. 무릇 선생님의 위대한 덕은 가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그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여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셨으며 또한 그 잘못의 까닭을 바로 말하지 않았으니 마치 애초에 맹자의 일을 알지 못한 것처럼 하셨으므로 만세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31. 子 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공자께서는 사람들과 더불어 노래를 하는데 훌륭하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하게 했고, 이후에는 그와 함께 부르셨습니다.

 

反, 復也, 必使復歌者, 欲得其詳而取其善也, 而後和之者, 喜得其詳而與其善也, 此, 見聖人氣象, 從容, 誠意懇至, 而其謙遜審密, 不掩人善, 又如此, 蓋一事之微, 而衆善之集, 有不可勝旣者焉, 讀者, 宜詳味之,

반은 다시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다시 노래하게 했다는 것은 그 자세함을 얻고 그 훌륭함을 취하고자 함입니다. 그 이후에 그에 함께 했다는 것은 그 자세함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그 장점을 함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인의 기상(아우라)이 외부의 흐름을 포용하여 따르며 진실한 뜻이 간곡하고 지극하며, 그 겸손한 것이 이토록 대단하여 다른 사람의 훌륭함을 가리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으셨습니다. 한 가지 일의 작은 일에 여러 훌륭한 것이 다 모여 있으니 이루 다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읽는 자는 마땅히 상세히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32. 子 曰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 未之有得.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만 같지 않겠는가. 몸소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면 내가 얻은 것이 있지 않다.

 

莫, 疑辭, 猶人, 言不能過人, 而尙可以及人, 未之有得, 則全未有得, 皆自謙之辭, 而足以見言行之難易緩急, 欲人之勉其實也,

막은 의문사입니다. 남과 같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순 없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에 미칠만은 하다는 것입니다. 얻은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은 전혀 얻은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인데 모두 겸양의 말입니다. 이것은 행동의 어렵고 쉬움과 완만하고 급한 것을 말하여 사람들이 그 실질에 힘쓰게 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謝氏曰文雖聖人, 無不與人同故, 不遜, 能躬行君子, 斯可以入聖故, 不居, 猶言君子道者三, 我無能焉,

사씨가 말했습니다. 문에 있어서는 비록 성인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군자의 도를 몸소 행하는 것에 있어서는 성인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공자께서 자처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중용에서 ‘군자의 도가 세 개인데 나는 능한 게 없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33. 子 曰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公西華 曰正唯弟子 不能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성과 인 같은 것은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러나 배움에 싫증내지 않고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공서화가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此亦夫子之謙辭也, 聖者, 大而化之, 仁則心德之全, 而人道之備也, 爲之, 謂爲仁聖之道, 誨人, 亦謂以此敎人也, 然, 不厭不倦, 非己有之, 則不能, 所以弟子, 不能學也,

이것 또한 선생님의 겸사입니다. 성인이란 위대하면서도 만물과 화하는 것입니다. 인은 심덕이 온전하고 인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위지는 인성의 도를 하는 것이며, 회인은 또한 이것으로 사람을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러나 싫증내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인성지도가 있지 않으면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제자들이 배울 수 없는 까닭입니다.

 

晁氏, 曰當時, 有稱夫子聖且仁者, 以故, 夫子辭之, 苟辭之而已焉, 則無以進天下之材, 率天下之善, 將使聖與仁, 爲虛器, 而人終莫能至矣, 故, 夫子, 雖不居仁聖, 而必以爲之不厭, 誨人不倦, 自處也, 可謂云爾已矣者, 無他之辭也, 公西華, 仰而歎之, 其亦深知夫子之意矣,

조씨가 말했습니다. 당시에 선생님을 위대하고 인하다고 칭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그것을 사양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사양하기만 했다면 천하의 인재들을 나아가게 할 수 없고 천하의 훌륭함을 이끌 수가 없어서 장차 성과 인으로 하여금 빈 그릇이 되게(알맹이가 없게) 하여 사람들이 끝내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비록 인과 성에 대해선 자체하지 않으셨지만 반드시 배우는 것을 싫증내지 않고 가르침을 게으르지 않으신 것으로 자처하셨습니다. 말할 뿐이라고 한 것은 다른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공서화가 우러르며 감탄한 것은 또한 선생님의 뜻을 깊이 안 것입니다.

 

34. 子 疾病 子路 請禱 子 曰有諸 子路 對曰有之 誄 曰禱爾于上下神祇 子 曰丘之禱 久矣.

공자께서 병이 심해지시자 자로가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있는가. 자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있습니다. 뢰문(망자 떠나 보내는 제문)에 보면 너를 위해 상하의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

 

禱, 謂禱於鬼神, 有諸, 問有此理否, 誄者, 哀死而述其行之辭也, 上下, 謂天地, 天曰神, 地曰祇, 禱者, 悔過遷善, 以祈神之佑也, 無其理, 則不必禱, 旣曰有之, 則聖人, 未嘗有過, 無善可遷, 其素行, 固已合於神明故, 曰丘之禱, 久矣, 又士喪禮, 疾病, 行禱五祀, 蓋臣子迫切之至情, 有不能自已者, 初不請於病者而後禱也, 故, 孔子之於子路, 不直拒之, 而但告以無所事禱之意,

도는 귀신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저는 그러한 이치가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뢰는 죽은 이를 슬퍼하여 그 행적을 기록한 말입니다. 상하는 천지를 일걷는데 천은 심을, 지는 기를 말합니다. 도라는 것은 잘못을 뉘우쳐서 선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신의 도움을 비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가 없으면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진 않습니다. 이미 있다고 하더라도 성인은 잘못이 있는 적이 없어서 옮겨갈 만한 게 없으며 평소 행실에 진실로 신명과 합치되므로 공자님의 기도가 오래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상례(예기)에 병이 심해지면 오사에게 기도를 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하와 자식이 긴박하고 간절함이 지극한 정이 있으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애초에 병자에게 청하지 않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자로에게 직접적으로 거절하시지 않고 다만 기도를 일삼을 바가 없다는 뜻을 알린 것입니다.

 

35. 子 曰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치하면 겸손하지 않고 검소하면 고루하게 된다. 겸소하지 않느니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孫, 順也, 固, 陋也, 奢儉, 俱失中, 而奢之害大, 晁氏, 曰不得已而救時之弊也,

손은 따르는 것입니다. 고는 누추한(구질구질한) 것입니다. 사치와 검소는 모두 중도를 잃는 것입니다. 사치의 해악이 더 큽니다. 조씨가 말했습니다. 부득이하게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36. 子 曰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마음이 넓어서 안정되어 여유롭고 편안하며, 소인은 늘 걱정이 가득하고 노심초사한다.

 

坦, 平也, 蕩蕩, 寬廣貌, 程子, 曰君子, 循理故, 常舒泰, 小人, 役於物故, 多憂戚, 程子, 曰君子, 坦蕩蕩, 心廣體肦,

탄은 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탕탕은 너그럽고 넓은 모양입니다. 정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이치를 따르므로 마땅히 크게 펼치고 편안하며 소인은 외물에 부림을 당하여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정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평온하고 안정되어 몸이 편안하다는 것은 대학의 ‘심광체반’입니다.

 

37. 子 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공자께서는 온화하시면서도 엄숙하시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시며, 공손하시면서도 편안하십니다.

 

厲, 嚴肅也, 人之德性, 本無不備, 而氣質所賦, 鮮有不偏, 惟聖人, 全體渾然, 陰陽合德, 故, 其中和之氣, 見於容貌之間者, 如此, 門人, 熟察而詳記之, 亦可見其用心之密矣, 抑非知足以知聖人而善言德行者, 不能記, 故, 程子, 以爲曾子之言, 學者, 所宜反復而玩心也,

려는 엄숙한 것입니다. 사람의 덕성은 본래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으나 기질이 부여받은 바가 치우치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오직 성인만인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어 음양의 우주작용과 덕이 합치되니 그래서 중화의 기운이 용모의 사이에 드러남이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익숙하게 살펴서 상세하게 그것을 기록했으니 또한 그 마음 씀의 세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는 것이 족히 성인을 알아서 덕행을 잘 말할 수 있는 이가 아니라면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증자의 말씀으로 여겼으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반복하여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헥. 드디어 술이도 끝났습니다. 지난 시간엔 아주 오랜만에 즐거운 짜장면 회식이 있었죠. 오영샘이 안 계신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더랬습니다.

다음 번엔 꼭 참석하시길.

10주가 되었으므로 돌아오는 주는 휴강입니다~

한주 즐겁게 쉬시되, 그 다음 주엔(30일) 시험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고 사이 시간을 부디 지혜롭게들 씁시다!

재시험 없이 가보죠~ 화이팅~
전체 3

  • 2017-04-19 09:16
    늦은 시각에 후기 올리느라 애쓰셨어요.
    소인 척척 부분에서 어찌나 찔리던지.
    제 마음 속에는 ' 척척 '소리내는 기차가 매 순간 지나다니거든요.

    • 2017-04-20 18:53
      요즘 핫하신 지현샘~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시는군요!!!

  • 2017-04-21 11:05
    '이것은 겸사입니다.' 채운쌤은 주석가들이 공자를 지나치게 완벽한 인물로 본 것 같다고 하셨죠. 어쩌면 공자의 저 말은 겸사가 아니라 정말 솔직하게 얘기한 것일수도 있는데 말이죠. 공자가 예에 어긋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지만 그 예가 겸손함만을 뜻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문약례할 때의 예는 학문의 결과니까요. 그러면 예할 때 생각나는 겸손한 법도 같은 것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