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5.2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첫시간 후기

작성자
알렉스
작성일
2017-05-24 20:49
조회
323
규문의 새 공간에서 니체의 새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만 봐서는 휴머니즘에 대한 예찬의 책이 아닐까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니체는 인류가 지녀온 가치들과 이에 기반한 세계해석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오류와 나약함, 무지몽매함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습니다. (경아샘 지적처럼, ‘너무나’로 번역한 독일어의 allzu, 영어의 all too 에는 모두 부정적인 뉘앙스가 짙게 들어있죠.)  1878년 출간된 초판을 볼테르 사후 100년을 기념해 그에게 헌정했던 것도, 그의 계몽정신을 이어받아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것들에 빛을 밝히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셈입니다.

 인간적 오류라는 말은 인간중심적 사고에 내포된 커다란 문제점을 가리키는 말이겠지요. 바로 “인간이란 영원한 진리이며,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변하는 존재, 사물의 정확한 척도라는 생각(2)”입니다. 이 짧은 구절에 니체가 부정하고자 하는, 혹은 경계하고자 하는 표상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진리? 그것은 오류 아니면 기만, 기껏해야 제한된 관찰일 뿐이야. 영원과 불변? 형이상학자들이나 하는 헛소리이지. 만물이 생성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척도? 수많은 다양한 관점이 있을 뿐!

이 시기에 니체는 자연과학의 성과들을 많이 섭렵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철학과 학문들이 만족할만한 통찰을 주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원문에서는 자연과학이 가장 젊은 철학이라고 말하는 대목도 보이는데요, 어쨌든 본문 첫 글의 제목부터 ‘개념과 감각의 화학’입니다. 화학이란 바로 변화의 과학(science of change)이죠. 모든 물질과 현상은 원자들과 분자들의 끊임없는 이합집산 속에서 생성되고 해체되는 산물임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학문입니다. A와 B가 만나 전혀 다른 성질의 화합물인 C와 D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반응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형이상학적인 해석에서 흔이 있는 과장된 대립을 제외하고 어떤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성의 오류도 이러한 대립에 기인하고 있다(1)”는 것을 자연과학적 철학이 밝혀냈다고 단언합니다. 토론 시간에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질문도 나왔었죠. 여기서도 ‘제외하고’라는 한국어의 뉘앙스가 빠른 이해를 막고 있어요. 우리는 무엇을 제외한다고 할 때, ‘예외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이지만, 서구어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He’s a liar, except he doesn’t think so. 그는 거짓말쟁이야,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 그러니 여기서 니체는 “그 잘난 (혹은 못난) 형이상학자들이나 대립이 존재한다고 과장할 뿐, 사실은 그런 건 없어!”라고 강력히 말하는 셈입니다.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은 아포리즘들의 모음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요. 일련번호를 붙여가며 독립적인 단상들을 니체가 무슨 의도로 썼을까 하는 의문은, 제목들을 연결해보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해볼까요? 니체의 육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철학자들은 보잘 것 없는 진리를 존중(3)하는 유전적 결함(2)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생성되어 왔고, 사실과 인식 능력 역시 생성되어 왔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2)”는 점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해 영적인 해석(8)을 하게 되고, 전체가 아니라 부분에 매몰되는(6), 삶과 무관한 인식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점성술과 유사한(4) 미신과도 같은 것이며, 꿈 속의 오해(5)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세계의 설명방식(9,17,18)으로서 “무제약적 실체와 그와 유사한 사물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로 모든 유기체의 근원적인 그리고 낡은 오류이다.(18)”

저는 니체가 이런 형이상학적 실체론의 오류 – 존재하지 않는 어떤 ‘근원적 본질’에 자꾸만 실체를 부여하려는 잘못된 믿음 - 의 원인을 ‘언어’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언어를 창조하는 자는 자신이 사물에 대해 단지 기호를 부여할 뿐이라고 믿을 만큼 그렇게 겸손하지는 않았다.(11)” 소쉬르의 언어이론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1916년이고, 진지한 철학자나 사상가라면 언어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건 20세기 중후반 들어서면서 일텐데, 니체는 이미 이때(1870년대)에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가장 강력한 채색 도구가 바로 언어이겠죠. 이 채색하는 언어는 아름다움의 원천일 수도 있지만, 오류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즉 인간들은 인간종 특유의 언어문법을 따르게 되면서, 예컨대 ‘번개가 친다’와 같은 주어(명사)-술어(동사)의 구조를 따르게 되면서, ‘소리를 동반한 번쩍거림’이라는 행위가 일어나는 것(동사)이 전부인 것을, 마치 번개(명사)라는 실체가 있고 그것이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니체는 이것을 ‘꿈속의 상상’이라고 부르며,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결과에서 추리되고 결과에 따라 표상된다는 것(13)”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불교나 노자, 장자로 대표되는 동양의 지혜 속에서는 언어적 표상에 고착되는 위험에 대한 경계가 일찍부터 있어왔지만, 무(無)나 공(空)에 대한 인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서구적 전통에서 니체는 이런 인간인식의 허위성과 실체/주체의 부정이라는 사유를 길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를 불교적이라고 하고, 현대성을 열어젖힌 철학자라고 말하는 걸까요?

이렇게 인간중심적 인식과 그에 기반하는 모든 가치와 미덕들을 폄하하는 듯하던 니체는 1장의 후반부로 가면서 어떤 반전을 일으킵니다. 31절에서 33절까지의 제목이 그걸 말해주는데요, 이제 니체는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유기체적, 역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오류와 불공정함은 필연적이지만, 그것은 더 나은 단계로의 생성과정일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진리와 오류의 이분법에 갇히지 말고 관점주의적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니체는 말하는 듯합니다. 즉 진리이기도 하고 오류이기도 한, 혹은 진리도 아니고 오류도 아닌, 인간적 가치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통제하고 지배하고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겠지요.

수늬샘은 여기서 <비극의 탄생>에 나왔던, 삶의 고통까지도 포함하는 세계긍정이라는 주제가 변주되고 있다는 지적을 해주셨고, 건화 반장님도 푸코가 ‘통치’를 비판하는 목적은 그것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통치를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이런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지점에 있다는 언급을 해주셨지요. 모두 삶의 피할 수 없는 어떤 불공정함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껴안고 비틀어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노력들이라 생각됩니다.

니체에게 더 나은 관점이란 물론 더 건강한 삶, 더 자유로운 정신을 앞당기는 관점입니다. 서문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자유정신’이란 개념이 모두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게 사실인 것 같아요. 그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선 니체는 자신의 핵심적 개념을 비유적, 암시적으로만 보여주는 글쓰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후기 저작으로 가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더 중요하게는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을 쓸 당시 니체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병중에, 앓음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가 회고하고 있듯이, 자유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의 탄생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였습니다. 니체는 이 무렵 아직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중이었고, 그 파괴에 따르는 병을 앓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회복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암중모색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급히 결론을 달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니체와 함께 암중모색하는 것이 어떨까요? 도마뱀처럼 앞과 뒤를 번갈아 보면서. 다소 위험해 보이는 실험에 삶을 맡겨보기도 하면서.

이미 지면이 길어졌지만, 생각나는 시 한편이 있어 그것을 나누며 마무리하고 싶네요. 철학의 완성은 시죠.^^ 송기원 시인의 <회복기의 노래> 일부입니다.


그럼 다음 월요일 건강하게 만나요. 재원씨도 빨리 회복하세요~~.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 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 오르지.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 추는 구절들을.
익사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 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전체 3

  • 2017-05-25 10:45
    열린 페이지마다 구절들이 춤추고 있었군요.혼자서 열기 어려운 이 무시무시한 텍스트를 동학들과 함께 열고 춤출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니체와 나누는 암거래 속에서 조금씩 과즙을 맛보고 있습니다.아직 뭔 맛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 2017-05-25 20:25
    제가 니체식으로 얼마나 "인간적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세미나에요^^ 같이 하는 공부의 재미가쏠쏠 합니다~ 근데 시까지 가야하다니 갈길이 멀군요~~~

  • 2017-05-28 23:46
    오~~ 소리 절로 나게 잘 읽었습니다.
    시가 무척 멋집니다. 알지 못해 멋집니다^^ 물론 이러면 안되겠지만요 ㅋㅋㅋ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