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6.19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6-15 13:04
조회
224
이번 주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앞의 세 장과는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지는 챕터라는 말씀을 하셨죠. 앞의 장들에서 형이상학 · 도덕 · 종교를 특정한 조건 속에서 발생된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주로 심리학적인) 분석을 해나갔던 것에 비해 이번 장에서는 니체가 예술에 대한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도 천재, 영감, 저자와 독자, 음악, 예술의 작용 등등에 관한 독특한 아이디어들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선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죠. 『비극의 탄생』에서는 ‘음악정신’이라고까지 말하며 음악을 조금 특권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니체가 이번에는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하고 있죠. 물론 니체가 음악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음악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알렉스 샘은 당시 니체가 바그너를 떠나보내는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이해해볼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분명 ‘근대음악의 종교적 기원’같은 챕터를 종교성으로 회귀한 바그너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니체에게 예술은 곧 음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극의 탄생』에서 학문적 정신을 비판하며 예술의 토대를 이야기할 때도 사실상 그 예술은 음악이었고, 이번에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을 비판할 때에도 그 예술이란 결국 음악입니다.  

니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탈감성화된 예술이 아니었을까요?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핵심으로 언급한 음악은 개별자들의 자아가 지닌 있는 안전장치들을 해제하고 삶의 무의미를 직면하게 하는 것이었죠. 이번에 읽은 4장의 213절에서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디오니소스축제는 그리스인들에게 ‘무의미에서 느끼는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탈감성화된 예술은 그리스 비극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음악이 기술적으로 발전하고 그에 따라 인간의 귀가 음향의 비유를 즉시 해석할 수 있도록 훈련될수록 인간의 감관은 어떤 면에선 둔해져왔습니다. 감관이 더욱 촘촘하게 분할되고 상징과 비유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훈련될수록, 음악에 의해 적대적인 세계가 정복되고 번역될수록 인간은 자신을 애워싸고 있는 소음들 속에서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와 상징만을 재발견하게 될 뿐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인간의 감관은 점차 새로운 방식으로 변용되지 못하고 같은 방식으로만 자극받게 되어 왔다는 것이죠. 점차 “기쁨이 머리 속으로 옮겨지고, 감각기관 자체가 둔해지고 약해지며, 상징적인 것이 더욱더 많이 존재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 니체는 이러한 탈감성화 과정을 ‘야만에 이르는’ 길이라고 역설적으로, 혹은 어떠한 역설도 동원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천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천재에 대해서도 『반시대적 고찰』에서와는 조금 다른 톤이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니체가 천재와 비천재(?)를 미리 주어진 것으로 보고 구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가령 거인과 난쟁이의 비유), 이번에는 우리에게 조금은 희망(?)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히려 니체가 우리의 도피처를 없애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가의 작업을 영감에 의한 신비적인 과정으로 상상하고, 천재를 우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트려 놓을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때 ‘천재’나 ‘영감’과 같은 관념은 우리의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죠. 니체는 심지어 천재예찬을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에 의해 부추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자신이 라파엘로 그림을 스케치하거나 셰익스피어 극 같은 장면을 하나 만들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허영심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능력을 특별하고 희귀한 우연으로 간주하려 한다는 것이죠. 누군가를 지나치게 예찬하거나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비하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허영심에 의한 것은 아닐까요.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벼워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주 공지하겠습니다.

1. 불교세미나와 시간이 겹치는 관계로 2시 30분으로 세미나 시작 시간을 옮기리로 했습니다.
2. 간식은 무영샘과 선화샘, 발제는 무영샘이 맡아주셨습니다.
3. 이번주에 읽어오실 부분은 5장 「좀더 높은 문화와 좀더 낮은 문화의 징후」입니다.
4. 다다음주(6.26)에는 채운샘 강의가 예정되어 있으니 이번 시즌에 『반시대적 고찰』 3권부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5장까지를 읽으며 생긴 질문들을 각자 정리해 오셔야 합니다! 텍스트와 무관하게 니체에 대해 갖게 된 질문도 괜찮습니다.
전체 3

  • 2017-06-16 17:39
    결석의 아쉬움을 후기로 달래요~ 질문 니체가 말하는 '탈감성화의 야만'에서 야만은 어떤? 야생성? 그런간가요?

    음...읽어내는 것도 막막한 상황에 다음주 발제~ 앞서 발제하신 분들 대단하십니다!!
    발제를 묻어버릴 간식 준비해서 만나겠습니다.

    • 2017-06-17 16:34
      무영샘 전화 주세요.

    • 2017-06-17 20:34
      민경샘이 답해주시는 건가요?ㅎㅎ 제 생각에 니체는 고차원적인 상징과 비유를 즉각적으로 이해하도록 훈련된 우리의 감각이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다시 발견할 뿐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훈련되기 이전보다 둔감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야만'은, 겉으로는 세련되게 갈고닦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감관이 우리 머릿속의 상징체계 안에서만 작동할 뿐, 낯선 것에 반응하는 데에는 오히려 무능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가 아닐까요? 무영샘 발제 화이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