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들

영화들 첫 시간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12-20 14:17
조회
205
지난 주 금요일, 고대하던 〈영화, 들〉 세미나가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을 보고, 저녁 먹고, 밤 산책도 하고, 채운샘의 인트로 강의도 들었습니다! 첫날부터 한 게 참 많군요! 토론 시간이 없었던 게 아쉬웠습니다. 채운샘 강의가 끝난 후 세미나를 마치기 전, 이러저러한 생각들과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는데 시간관계상 마쳐야 했습니다. 못 다한 얘기는 이번 주 금요일에 풀어내보아요~

- ‘올바른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이미지pas une image juste, juste une image’

들뢰즈에게 영화란 무엇이며, 영화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들뢰즈는 예술을 사유의 재료로 삼고자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회화, 음악, 건축, 영화는 각각이 특유한 사유를 구성하게끔 해주는 철학의 도구였습니다. 각각의 장르로부터 그가 길어 올릴 수 있었던 사유의 이미지는 상이한 것이었습니다. 회화에는 회화만이 가능하게 해주는 사유가 있고, 음악에는 음악만이, 또 영화에는 영화만이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사유의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죠. 들뢰즈는 자신이 “영화에 철학을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철학에서 영화로 바로 가려고”(《뇌는 스크린이다》)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처럼, 《시네마》는 들뢰즈 자신의 철학을 도구 삼아 영화를 분석하거나 영화를 철학적 개념의 이미지를 다양화해주는 도구로서 차용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들뢰즈에게 영화란 ‘이미지’와 ‘운동’, ‘시간’을 사유하게 해주는 재료였으며, 《시네마》는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새롭게 구축한 사유 자체라고 합니다.

들뢰즈는 예술이 그 매체와 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고 하죠. 영화적인 것, 영화라는 매체를 강조할 때 들뢰즈가 거부하는 것은 영화에서 ‘올바른’ 이미지를 찾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현실에 대한 재현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올바른’ 재현인지를 묻습니다. 영화가 모방하고 있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죠. 그 영화가 얼마나 정치적,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역사를, 노동자를, 가족을,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는 방식. 이미지란 실재의 모방이며 따라서 그것은 도덕적 토대 위에서 논해질 수 있다는 생각. 이렇게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 위계를 설립하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는 매우 익숙한 방식이죠. 그러나 이는 분명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포착하는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들뢰즈를 따라 영화를 읽기 위해서 먼저 영화를 보는 우리의 가장 익숙한 습관을 벗어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 영화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지,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 이미지 = 물질·운동·지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면, 이미지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철학을 빌려옵니다. 베르그손은 이미지와 실재를 일원론적으로 이해함으로서 흄의 관념론과 데카르트의 실재론을 넘어가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운동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운동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흔히 위치의 변화를 운동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운동을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제논의 역설에 빠지게 됩니다. 운동이 위치의 변화라면 우리는 그것을 무한히 분할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뒤늦게 출발한 아킬레우스는 앞서가고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때 운동이란 공간적 점이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멈춰있는 점들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이것은 운동을 포착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위치의 변화로부터 사후적으로 운동을 유추해내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은 전혀 다른 전제 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세계에 멈춰있는 것이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멈춰있거나 고정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으며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고정된 점’이라는 것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운동을 공간의 변화와 결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겠죠. 모든 것은 이미 운동 중에 있으므로. 베르그손은 운동을 공간이 아닌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합니다. 시간과 운동... 사실 이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운동은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생성-소멸하는 운동들이 시간을 출현시킨다는 뜻일까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물질이 곧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고정된 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운동이라면, 이미지란 무엇일까요? 채운샘은 ‘움직이는 전체 물질의 세계 속에서 하나가 다른 것에 대해 포착한 단면’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미지란 운동하고 있는 내가 마찬가지로 운동 중인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산해낸 하나의 단면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미지는 고정된 물질에 대한 재현일 수 없으며, 물질은 이미지에 앞서서 존재하는 무엇일 수 없습니다. 물질이란 끊임없는 이미지의 운동입니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인식에 대한 우리의 전제를 문제 삼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만이 지각한다고, 또한 ‘올바른 지각’이라는 게 있다고 믿죠. 그러나 운동하는 모든 것들이 운동하는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포착한 단면이 이미지이고 지각이라면, 이러한 전제는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 카메라의 눈으로 보기

그렇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세계를 부유하며 무의미한 이미지들을 생산해낼 뿐인 걸까요? 생명체는 이미지를 변양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주어지는 대로?) 포착하지 않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대상의 단면을 포착할 때 우리는 디테일들을 덜어내고 그것의 윤곽을 포착합니다. 범주화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차이들을 ‘나’라는 말로 퉁쳐버리죠. 포도송이에 맺힌 물방울의 수까지 기억하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게는 도저히 ‘같은 것’으로 지각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지각 속에서는 범주화되어 동일성을 부여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체들의 지각은 ‘덜어내기’라고 할 수 있죠. ‘윤곽’만 남기고 차이들을 제거하는. 이러한 덜어내기의 과정으로서의 지각에서 우리가 의존하는 것은 ‘기억’과 ‘습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과 습관에 강하게 의존할수록 세계는 우리의 행위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출현할 것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주의적인 방식으로부터 시점을 해방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카메라의 눈으로 세계를 지각하게 하기 때문이죠. 채운샘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는 우주 곳곳에 깃들어 있는 비인간적 관점들을 포착하게 해줍니다. 가령 영화에서 인물들이 떠난 자리를 응시하거나 사람들이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는 테이블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누구인가요? ‘카메라’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죠. 영화는 그 특성상 정박된 중심과 습관된 봄을 해체시키는 실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채운샘은 마이클 스노우를 예로 들어주셨는데, 그는 바람에 흔들리도록 카메라를 설치해서 바람의 지각을 필름에 담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채운샘은 지각이란 제기된 각각의 질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포착하는 방식에는 이미 우리가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세계를 문제화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지요. 들뢰즈를 읽고 낯선 영화들을 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습관화된 이미지를 느슨하게 하는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현실화하는 방식을 절대화하지 않고 잠재적 지각을 열어가기.

* 이번 주 금요일에는 《시네마 Ⅰ》 2장 〈화면틀과 쁠랑, 화면잡기와 데꾸빠주〉를 읽고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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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23 00:19
    돌아보니 정말로 중요한 첫 강의. 명료히 정리하신 후기가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아요. 건화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