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들

영화들 두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12-23 23:30
조회
181
<영화, 들> 세미나 두 번째 시간에는 '화면틀과 쁠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을 하였습니다. 흠.. 사실 토론이라기 보다는 들뢰즈가 과연 무슨말을 한 것인지 추측해본 시간이었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것 같습니다만, 저번 시간에 채운샘이 말씀하신 습관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르게 보여주는 영화적 요소들에 관한 것들로 주로 논의되었습니다.

 

화면틀과 정보체계

챕터2의 첫번째 논의주제는 화면틀 cadre이었습니다. 들뢰즈는 ‘화면잡기 cadrage'를 “한 집합 안에 들어가는 온갖 종류의 부분들을 선택하는 기술"이라고 말합니다. 화면틀은 바로 이러한 화면잡기를 통해 선택된 부분들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화면틀로 인해 닫혀진 체계는 관객과 소통하는 데이터의 양을 결정하며, 그 수에 따라 화면틀은 포화상태 또는 희박한 상태로 나뉩니다. 토론에서 모두가 ‘이게 도대체 뭔가'라며 그 난해함을 토로한 첫번째 개념이 바로 이 ‘포화상태'와 ‘희박한 상태'였는데요, 들뢰즈가 포화상태와 희박한 상태로 예시를 든 것들이 정보전달이라기 보다는 정보를 일부러 ‘숨기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이것이 어떻게 정보전달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중심 장면이 원경에서 일어날 때 부차적 장면은 전경에 배치에 서로 병치시킨다거나, 중심 장면과 부차적 장면을 아예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포화 상태의 예시들이었는데요, 두 예시 모두 중심 장면과 부차적 장면을 따로 떼어서 사유하기보다 그 둘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희박한 상태의 예시로는-히치콕이 자주 사용하기도 하는-한 대상만을 강조하거나 검거나 흰 화면과 같이 부분들이 비어있는 상태가 있습니다. 대상을 한정함으로써 정보를 취사선택하거나 생략하는 과정으로 보여졌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채운샘이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이미지를 볼때 자신의 습관대로 한 대상이 보여주는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는데에 익숙해져 있는데요, 들뢰즈의 예시들은 그러한 습관을 깨뜨리는 방법들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우리의 빠르고 효율적인 ‘보기'의 행위를 넘어 적극적으로 ‘읽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히치콕이 우유잔을 텅 빈 흰 이미지로 보여주는 데에는 이것이 우유잔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우유잔의 낯선 이미지를 관객이 ‘읽어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마음대로 추측해 봅니다 ㅎㅎ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의 행위는 이어서 ‘이미지의 탈영토화'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신후샘은 우리는 보통 어떤 대상들의 특정 이미지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이미지를 벗어난 다른 방식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탈영토화가 아닌가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화면틀 논의를 계속하면서 ‘탈화면틀 décadrage’에 관해 들뢰즈가 예시로 든 <잔다르크의 수난>을 잠깐 예시영상으로 다같이 보았습니다. 잔다르크의 재판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는데요, 심문을 받는 잔다르크의 얼굴은 코, 입 또는 눈, 코만 보여지는 등, 얼굴의 일부가 화면틀을 벗어난데 반해 심문하는 자들은 화면틀 안에 온전하게 포착되어 보여졌습니다. 오늘부터 수업에 합류해 주신 예슬샘이 아주 재밌는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잔다르크는 온전한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면서 우리의 즉각적 감정이입을 방해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잔다르크는 동정 받아야 마땅한 비운의 주인공이고 그를 해치려 하는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못된 사람이라는 공식을 깨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아닌 것 같이, 기괴하게 잔다르크의 모습을 처리함으로써 우리의 습관적 심상을 벗어나는 것이죠.

 

쁠랑과 영화적 의식

쁠랑은 화면틀에 의해 “닫힌 체계 안에서 집합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운동의 한정"이라고 합니다. 휴...무슨말일까요? 들뢰즈는 쁠랑이 의식처럼 작용한다고 보며, 이 ‘영화적 의식'은 관객도,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닌 바로 카메라라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신후샘은 아무리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화면틀에 들어갈 요소들을 컨트롤한다고 해도, 카메라는 항상 감독의 의식 밖의 요소들도 포착한다고 말하셨죠. 예를 들어 감독은 사과를 찍었지만 카메라는 사과가 놓여있는 접시와 그 접시가 놓여있는 책상마저도 포착합니다.

책에서의 예시는 쁠랑이 전체와의 관계속에 어떤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는지 보여줍니다. 가령 우리가 생각하는 물새는 평화로운 자연 속 한가롭게 노니는 새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카메라가 포착한 물새는 날쎄게 사람에게 다가와 상처를 입히고 날아가 버립니다. 그 순간 물새는 더 이상 평화로운 자연이 아닌 “인간에 대적하려는 자연"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어 새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는가에 따라 이 전체는 또다르게 해석되겠지요.

 

장 비고의 <라탈랑트>

저번 시간에 본 <전함 포템킨>이 형식미를 보여주었다면, <라탈랑트>는 좀 더 네러티브 속의 재미가 느껴졌던 작품인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마주치는 사물이나 사람과의 사건을 통해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라탈랑트호의 속성과 맞닿아 보입니다. 라탈랑트호 또한 물 위를 흐르며 이 도시 저 도시와 ‘마주치며' 계속 이동하는 것처럼요.

1934년에 만들어진 <라탈랑트>가 다루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애정의 문제는 시간이 흐른 2017년에도 공감의 요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의 단면이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논점은 다른 시대의 사람이 보았을 때 생성되는 공감의 요소라던지, 아니면 한 사람이 젊었을 때와 나이가 들었을 때 같은 작품을 보고 다르게 느끼는 것 또한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길었던 결혼식 신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무표정이나 제한된 움직임도 재밌었다는 코멘트, 시종일관 ‘좁은 느낌'을 주는 카메라 앵글이 등장인물들이 체스를 둘 때만 잠시 탁 트여보였다는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3장 <편집>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다음에 볼 영화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인데요,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 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시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그럼 다음시간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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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24 01:55
    오오 신속한 후기! 줄곧 잡히지 않던, '이미지가 보기뿐만 아니라 읽기의 대상’이라는 말을 '이미지의 탈영토화'와 연결해서 설명해주셨네요. 여전히 헷갈리는 부분이 많지만 후기를 읽으니 그나마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