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수중전 시즌2 역사강의 7강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2-26 19:56
조회
69
수중전 텍스트 중 유일하게 제가 읽은 게 저번 5강의 《삼국지》와 이번 7강의 《십팔사략》입니다. 사실 《십팔사략》은 고우영의 만화로밖에 못 봤지만, 자극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읽은 건 예전인데도 포사, 달기 같은 경국지색의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 걸 보니 식색(食色)에 대한 욕망은 어릴 때부터 있었나봅니다. ^^;;) 《십팔사략》은 초학자를 대상으로 복희 같은 신화시대에서부터 송나라 말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시간을 하나의 시간축으로 간략하게 편집한 축약본입니다. 책 제목이 《십팔사략》인 것도, 18개의 정사(正史)를 축약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간략하게 사건 위주로만 정리했기 때문에, 《사기》처럼 전후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채로 툭툭 튀어나와 전개됩니다. 오직 재밌는 사건들, 특히 선과 악의 대립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 많아서 재밌게 읽을 순 있어도, 정작 각각의 사건이 일어난 맥락을 알 수 없습니다. 우쌤은 만약 저 같은 무지렁이가 《십팔사략》을 읽겠다고 덤벼들면, 우쌤처럼 어떤 사건이든 전후맥락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선생님과 같이 읽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난잡함 때문인지 《십팔사략》은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라는 목적으로 편찬되긴 했지만, 정사(正史)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후로도 줄곧 관심을 못 받은 편이어서 역사학계에서도 그다지 연구하지 않는 텍스트라고 합니다. 심지어 증선지라는 학자가 편찬한 걸로 알려지긴 했지만, 정말 증선지가 지은 것인지, 그렇다면 증선지는 누구인지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나 텍스트의 권위랄 게 없으니까 자연스레 다른 텍스트에 비해 더 쉽게 고치게 됩니다. 원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텍스트는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치면서 내용이 새로 들어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데, 텍스트의 권위 때문에 내가 자의로 바꿨다고 드러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십팔사략》 만큼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바꿨다고 밝힙니다. 그 과정에서 지금 남아있는 것은 명초 진은이란 사람이 교정한 판본이고, 이것이 1510년 중종 5년에 조선에 수입됐다고 합니다. 반면에 수정과정 속에서 증선지가 지었다고 하는 원본 혹은 정본은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우쌤은 크게 3개의 판본을 알려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유섬이란 명나라 사람이 자신의 역사관에 근거해서 책의 목차를 수정한 것입니다. 그는 조조의 위(魏)나라가 아닌 유비의 촉한(蜀漢)나라가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에 앞서 이미 강지의 후손인 강묵이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보는 《통감절요》를 1237년에 출간했습니다. 그러니까 딱히 새로운 이야기를 낸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다만 당시에는 활자가 발달하고, 출판업이 성행하면서 서림(書林), 서점이라 할 만한 것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서점에 있는 사람들도 텍스트를 상업적으로 고치게 되고, 유섬도 그런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십팔사략》을 손본 것입니다.

두 번째 판본은 여진이란 사람이 원(元)나라를 넣어 만든 《십구사략통고》입니다. 유섬의 스승은 왕봉이란 사람인데, 이 사람의 문인 중에 여진이 있었습니다. 증선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까지밖에 서술할 수 없었지만, 명나라를 살고 있는 여진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역사를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元)나라의 역사를 넣은 것이고, 왕조도 18개에서 하나 더 추가해서 《십구사략》이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팔사략》, 《십구사략》, 《이십사략》 등등이 있어서 그냥 《사략》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 판본은 조선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집어넣은 《화동사략》입니다. 예를 들면, 2권에서 기원전 57년(당시 한 선제), “이 해에 신라에서 박혁거세가 즉위했다.(是年新羅朴赫居世立)”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략》은 매우 인기 있는 텍스트여서 민간에도 보급이 됐는데, 그것은 명의 멸망에 힘입어 조선에서 더욱 소중화의식이 진행된 탓도 있습니다.

《십팔사략》의 또 다른 특징은 외국전과 사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기》에는 〈흉노전〉이 있고, 《정사 삼국지》에는 〈오환선비동이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팔사략》에는 그들에 대한 기록이 따로 없습니다. 아마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로 작성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다른 책에 비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진 않습니다. 그밖에 ‘태사공왈’처럼 작자의 평이 없다는 것과 오제가 아닌 그보다 더 앞서 태고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사기》와의 차이점이 두드러졌습니다. 족보도 무엇을 근거로 작성한 것인지 밝히지 않았고, 설혹 밝혔다 해도 그 책은 이미 소실되어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작자에 대한 조사도 없고, 텍스트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까닭에 읽는 재미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우쌤께서 길을 찾아주셨습니다.

우선 다른 시대에 비해 송나라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여진족, 몽골(금나라)에게 침략당해 멸망당하는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돼있습니다. 원래 중국의 한족은 주변 민족들을 야만족이라 말하며 자신보다 못한 부족으로 여겼는데, 거란족 아보기와 여진족 아골타, 원나라에게 멸망당하면서 자존심이 추락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크게 두 사건이 있는데 하나는 1004년, 북송 진종이 세폐(歲幣)라고 거란족에게 매년 은과 비단을 바치는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를 단연지맹(澶淵之盟)이라고 하는데, 처음으로 한족이 야만족에게 굴욕적인 외교를 맺게 된 사건입니다. 그 다음은 육수부가 황제를 업고 바다로 뛰어든 사건입니다. 일단 송나라의 역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입니다. 요나라(거란족이 세운 나라)에게 침략 받아서 고생하고, 그 다음에는 여진족 아골타에게 두드려맞고, 마지막으로 원나라에게 공격받으면서 끝내 멸망하게 됩니다. 송나라의 신하들은 어떻게든 조씨 가문을 등에 업고 다시 한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여기서 눈물 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송나라 마지막 황제 조병이 그 주인공입니다. 조병은 9살에 즉위해서 그 다음 해 초까지였는데, 마지막에는 섬에 고립되었다가 결국 바다에 투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기록된 글자가 구(驅)입니다. 구(驅)는 ‘내몰다’, ‘내쫓다’와 같이 강제적으로 내모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제는 빠지기 싫었지만, 신하들에 의해서 빠지게 된 것이죠. 그때 신하들은 이미 야만족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차원에서 처자식을 다 빠트린 상황이었고, 마지막으로 육수부라는 신하가 황제를 업고 같이 투신을 한 것이죠. 마지막에 가족을 이미 다 떠밀고 마지막으로 황제를 업은 육수부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니 왠지 뭉클해집니다. 여담이지만, 육수부는 1년 동안 전쟁을 겪고 피난 다니는 와중에도 조병에게 《대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송나라는 끊임없이 외세로부터 침략당하면서도 철학과 문학을 꽃피웠고, 전쟁을 겪으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조병의 모습이 어쩐지 겹쳐 보입니다.

이밖에도 문천상이란 송나라 신하의 얘기도 있습니다. 원나라에서 그를 회유하려했지만, 문천상은 “자고로 사람이 나면 누가 죽지 않겠는가? 단심(충심)을 지켜 역사에 비춰 남길 뿐이네(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青)라는 말을 남깁니다. 여기서 한죽(汗竹)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예전에 죽간을 만들 때, 대나무에 땀을 내듯 바짝 말리는 과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듯 역사란 마음을 다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십팔사략》에는 주변국의 얘기가 없지만, 이렇게 침략 받는 과정을 잘 살피다 보면 그들이 주변국을 어떻게 보는지 드러납니다. 여진족을 기록할 때 생여진과 숙여진으로 구분했는데, 생여진(生女眞)은 함경도 이북 지방이고, 숙여진(熟女眞)은 보다 중국 쪽에 가까운 지역의 여진족을 말합니다. 이성계도 함경도 이북지방의 출신이니까,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도 중국에서 보기엔 생여진이었고 조선도 여진족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조선을 완전 무너트리지 않은 까닭도 자신들의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건 아직 학계에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ㅎㅎ 어쨌든 한족과 주변 민족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관점 그리고 조선 역시 많은 야만족 중 하나의 야만족의 입각해서 볼 때, 이전과 다른 시선에서 동양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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