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11주차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2-13 19:12
조회
156
제가 후기를 써야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놓고 있었네요^^;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를 하나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처럼 고통도 긍정으로 만든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그들은 제거도, 제외도, 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재인식한다. <그와 반대로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로 경련과 마비를 만들고, 고통으로 삶을 비난하고 삶에 반대하는 수단을 만들고, 또 삶을 정당화하고 모순을 해소하는 수단을 만들어낸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45쪽)

지난주에는 드디어 《니체와 철학》의 1장을 마무리했습니다. 우선 난희샘이 올려주신 (위의) 구절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난희샘께서도 댓글로 남겨주신 것처럼 위 구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단어는 ‘과잉’인 것 같습니다.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관건은 여기에서의 ‘과잉’을 상대적인 ‘많음’이 아니라 ‘흘러넘침(overflow)’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가 ‘잡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을 넘쳐흐르고 움켜쥔 우리의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중에 있는 무엇이라는 것. 그리고 고통은 바로 이러한 삶의 과잉과 흘러넘침으로부터, 늘 이행하는 중에 있는 것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이러한 통찰이 바로 고통을 긍정으로 만드는 통찰입니다.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의지와 기대, 표상을 가뿐히 넘쳐흐르는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긍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세계와 삶을 유죄 판결하는 대신에 생성으로서의 세계를 표상에 가두려고 하는 자신의 의식을 문제 삼습니다. 문제는 오류나 악, 죄 같은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을 절대화하는 우리의 부적합한 인식입니다. 이에 반해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세계 그 자체로부터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여기에는 고통을 출현시키는 조건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끊임없이 삶의 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외부로부터 구하며 삶을 비난하고 정당화하기를 되풀이하게 될 뿐, ‘긍정’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1장의 마지막 챕터인 ‘시금석’에서 들뢰즈는 파스칼과 니체를 비교합니다.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 체스톱 같은 철학자들은 세계에 대한 ‘비극적인’ 견해를 피력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현존 자체의 불완전성을 사유한 이들은 비극철학자라고 불립니다. 들뢰즈는 니체를 이러한 비극 철학자들과 연관 짓는 해석들과 거리를 두며 니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극 철학자들의 세계-해석을 특징짓는 것은 ‘내기’의 방식입니다. 파스칼은 신의 현존을 두고 내기를 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건 신의 현존을 긍정하는 쪽에 거는 것이 이득이라는 논증을 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들 딱히 잃을 건 없다는 거죠. 여기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바로 놀이의 정신-즉 이득과 손해의 계산과 무관하게 매번의 던져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비극적 사유의 핵심은 인간의 현존을 어둡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들에 부여된 표상들이 자신의 현존을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해서 (희망도 절망도 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난희샘이 질문하신 구절과 1장의 마지막 챕터를 살펴본 뒤에는 시간이 조금 남아서 2장의 첫 부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힘들이 그것에 속하는지, 그것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85)라는 낯선 구절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다? 무슨 뜻일까요? 이는 힘들의 활동으로서의 신체가 그 결과이자 징후로서의 의식보다 선차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외부와의 관계에서 능동적으로 변이하고 자기 조절을 하는 중에 있는 신체가 있고 그에 반응하는 의식이 있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의 ‘신체’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늘 운동하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 충동, 욕망, 감각 등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신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체’란 ‘인체’가 아니라 ‘힘의 영역’인 것이죠. 그러니까 신체의 선차성을 이야기함으로써 들뢰즈는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월함이 아니라 의식된 것, 인식 가능한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등등을 항상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혹은 동시에 그것들을 조건 짓는 힘의 차원과 더불어서 이해해야 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에는 2장의 2, 3, 4번을 읽고 함께 나눌 이야기를 간단히 메모해오시면 되겠습니다~ 세미나는 공지드린대로 4시에 시작하구요~ 간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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