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마이너스] 12주차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9-12-16 11:09
조회
186
 

 

‘모든 것은 힘이다’라고 말할 때 불충분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세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여러 다양한 힘(곧 충동)들의 복합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정신(이성, 합리성)을 신체(욕망, 충동, 정서)에 대해 특권화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힘이다’라는 이 말 다음에 또 다른 문제가 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서 힘이 어떠한 방식으로 발휘되도록 할 것인가? 즉 무엇이 삶을 긍정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더 고귀한 힘의 사용인가?’ 이것은 사물과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윤리적인 문제이며, 힘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더 섬세하게 실감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힘은 어떤 생리를 갖는가?’

들뢰즈는 니체의 힘 개념으로부터 상이한 두 가지 성격을 정리합니다. 앞에서 저희는 모든 힘은 복수적이며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힘도 다른 힘들과의 ‘긴장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들의 관계라는 것은 언제나 복종하거나 명령하는 것 둘 중 하나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모든 힘은 복종하거나 명령하기 위해서 다른 힘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87) 달리 말하면 어떤 힘도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지어지는 특정한 ‘서열’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의 서열은 힘의 물리적 차원에서의 강함이나 약함이라는 수량적 위계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적극적인가 아니면 반응적인가 하는 힘의 두 가지 경향성의 구분입니다. 들뢰즈가 힘에 대한 논의를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도입한 반응적인 힘/적극적인 힘, 복종하는 힘/지배하는 힘, 열등한 힘/우월한 힘이라는 구분쌍은, 어떤 것이 더 선한가 악한가 혹은 무엇이 우세한가 취약한가를 구분하려 의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발휘되는 방식은 상반되지만 그 두 힘은 고정적이고 독립적인 속성이나 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어떤 유형의 힘도 다른 유형의 힘들 간의 차이 속에서 그러한 힘으로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것을 힘으로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응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열등한 힘들]을 소위 다른 유형에 속하는 우월한 힘들과 관련짓지 않는다면, 반작용들은 힘으로 파악될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다.”(92)

유의해야 하는 점은 복종하는 힘은 명령하는 힘에 의해 굴복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상태로, 계속해서 반응적인 방식으로 발휘되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미나에서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었습니다. 어떻게 더 강한 힘에 대해서 약한 힘이 굴복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은 힘을 여전히 개체의 물리적 속성으로 보고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반응적 힘은 보전, 적응, 실리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 힘을 작동시킵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힘의 무엇도, 자신들의 힘의 양의 무엇도 상실하지 않으며”(88) 작동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법칙도 없이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에 사후적으로 인과를 설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보존하고 기억하고 구분하고 적응하는 작업,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의식의 활동입니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다.”(89) 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반작용의 구성물입니다. 운동 중에 있는 것, 이행중인 것, 무의식적인 것을 감각이나 언어로 얼기설기 엮어서 인식 가능하게 해놓는 것이 의식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유기체가 세계를 해석하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기체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다 해체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유기체이고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적극적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적극적인 힘의 특징을 “소유하고, 탈취하고,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유하는 것은 형태를 강요하는 것, 결과들을 활용해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91)합니다. 이것은 해체나 파괴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사실 그 어느 것도 해체나 파괴만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단순한 파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로지 창조하는 자라야 파괴도 할 수 있습니다. 무모한 탈영토화는 곧바로 또 다른 영토에 붙들리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영토로부터 달아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를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힘은 “참으로 적극적인 하나의 조형적 힘 -즉 변신의 힘-”(91)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변이와 이행은 우리 신체뿐 아니라 세계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고정이 아니라 운동이, 보존이 아니라 변이가 더 선차적입니다. 요점은 개체인 우리는 상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사물과 관계를 맺으며 사후적 구성물인 의식을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여태까지 세계와 사건들을 의식을 특권화하는 방식으로 바라봐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특히 근대는 평등, 합리성, 공리주의 등 고정 값을 더 우선시하고 유지하려하며 더 쌓아나가려고 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들뢰즈는 니체로부터 이 같은 우리의 반응적 힘에 의한 해석에 질문을 던지고 오히려 적극적인 힘이 더 선차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인 힘과 반응적인 힘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때의 다름을 질적으로 개별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범주로 나눠 신비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질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질은 양적 차이, 즉 양태의 표현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질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는 양적 특성들과 무관하게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내면이나 속성 혹은 본성과 같은 것일까요? 니체는 모든 양이 질의 징후일 수는 없는지 묻습니다. 니체라는 인간의 질적 특성이 니체의 일상, 즉 밥을 먹고, 산책하고, 사람을 대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돈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관계 맺는 현존과 무관하게 따로 마련되어 있을까요?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질은 양적 차이와 다른 것이 아니고, 관계 속에 있는 각각의 힘들 속에서 그것[양적 차이]에 상응한다.”(94) 어떤 대상도 그것을 그 대상으로 드러나게 하는 관계들과 동떨어진 질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이렇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질, 세계에 대한 다른 감각,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은 것은 자신이 사물이나 사람과 맺고 있는 관계, 즉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즉 행위와 관계가 변하는 와중에 욕망과 성향과 같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니체는 “모든 질을 양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광기이다”(93)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질을 양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와 공평이라는 가치 아래 우리는 똑같이 한 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다수 중 한 명의 가치로 획일화됩니다. 우리는 측정 가능한 한 명이라는 양으로 환원됩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의 원리 전반이 말 그대로 질을 양으로 환원시켜버리는 대표적 경향이지요. 따라서 양적 차이가 질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에게 이중의 중요성을 갖습니다.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가치 속에 깃든 자기보존과 동일화에 대한 욕망, 즉 복종하는 반응적 힘을 발견하게 하며 동시에 사물과 사람에 대해 다른 거리를 만들어 내는 생활양식의 훈련이 곧 다른 질을 갖고 다르게 느낌을 조형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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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18 22:55
    모든 질을 양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광기이다 ᆢ
    이 문장에서 저는 광기를 경계를 넘어버린 이성으로 읽었죠 ᆢ민호샘 글을 보고 다시 곰곰히 생각을 정리하게 됐어요
    토론 때보다 글이 더 명료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