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시즌2 , 1주차 후기

작성자
인영
작성일
2020-03-20 01:30
조회
191
<니체마이너스> 시즌2 들뢰즈, 『니체와 철학』 1주차 수업 후기

제 3 장 비판

1. 인간과학들의 변화

니체가 과학들의 종합 검토를 보잘것없게 여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과학 발전이 현상들을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며 부정적인 개념들로 해석했고, 현상의 반응적이고 부정적인 해석의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힘들의 기원과 계보학에 대한 무지이며 해석의 한계입니다. 사실이란 하나의 해석이며, 생성된 것이고, 어떤 역사적 조건 속에서 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이라는 하나의 해석을 어떤 유형의 해석인가 묻고, 하나의 의지로 표현된 진리로써 누가 원하는 진리인지도 질문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이념도 진리를 찾는 자에게 인간의 마음에 더 이상 기대지 않는 하나의 신학으로써 발명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념은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형성돼 행위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입장에 이득이 되어 좋은 것이 선한 것이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 도덕으로 행위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에는 감정, 감각, 지성, 욕망 모두 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실리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힘이 행위의 출발이자 결말이라면 공공의 실리를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대해 니체처럼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누구에게 유용하거나 해로운가?”라며 니체는 실리의 개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묻습니다. 수동자(남에게 어떤 동작을 받아 움직이는 자)는 행동을 유용성과 유해성의 관점에서 보고, 그 동기와 결과의 관점에서 주시합니다. 그는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득의 관점에서 평가하기 위해서 주시하는 자임에도, 수동자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권리(자연권)로써 행동에 대한 소유와 그에 따른 실리를 챙길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공리의 원리라고 한다면 비천함이 너무 과장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행동하는 자일까요? 주시하는 자일까요? 또한 공공의 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공리의 개념을 니체의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면 공리주의 원천은 수동적인 모든 개념의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에 반하는 이익은 모두 부정되므로 개별적 차이를 획일화, 평균화시키는 노예적 가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만들고 자신들이 복종하는 개념이자, 원한이며 원한의 요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수동자의 예처럼 사람들은 청자의 관점에서 언어를 판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니체의 적극적인 문헌학은 단 하나의 원리, 단어는 화자가 그것을 말할 때 어떤 것을 원함에 따라서만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단 하나의 규칙, 말을 현실적 활동으로 다루는 것, 화자의 관점에 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니체는 “단어를 어떤 대상에, 어떤 사실에 결부시켰다. 그래서 그것들을 소위 소유해 버리고 말았다”라고 비판합니다. 니체의 적극적 언어학은 청자가 아닌 화자, 모든 단어를 명령어처럼 명명하는 자를 발견하길 원합니다. 왜냐햐면 한 단어의 의미 변화는 다른 힘과 다른 의지가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독점하고, 그것을 다른 것에 적용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선량함>이라는 단어를 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실리에 따라  좋음과 나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노예는 원한의 감정을 담아 선과 악이라는 단어로 이해하고 주인으로부터 빼앗습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 개념 속에서부터  비천함과 노예적인 가치들을 덜어내는 것이 시급함을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가벼워지기 위해서 말이죠.

적극적인 과학만이 적극적인 힘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응적인 힘들을 재인식 할 수 있으며 현실적인 활동들뿐 아니라, 힘들 사이의 현실적 관계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유형으로 제시합니다. 현상들을 해석, 징후들로 다루며, 그 징후들을 낳는 힘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 징후학, 적극적이거나 반응적인 힘들의 성질의 관점에서 그 힘들을 해석하는 유형학, 힘들의 고귀함이나 저속함의 관점에서 그 힘들의 기원을 평가  평가하는 그리고 그것이 권력의지 속에서 또 의지의 성질 속에서 그것들의 선조를 발견하는 계보학. 그래서 들뢰즈는 니체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징후를 해석하는 의사로서의 철학자, 유형을 만드는 예술가로서 철학자, 힘의 서열과 그것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입법하는 철학자를 삼위일체로 비유합니다. 이와 같이 니체는 과학, 예술, 철학함에 있어서 힘 관계로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미래의 징후를 읽도록 우리의 현재를 열어 줍니다.

2. 니체에게서의 의문의 정식

형이상학에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본질을 묻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아름다움이란 본질을 전제하고 그 본질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아름다움을 완전히 느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아름다움의 본질을 알 수는 있을까요? 인식하는 자의 개념에 가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다르게 니체는 계보학적으로 질문합니다. “누구의 아름다움인가?, 어떤 아름다움인가?” 이런 질문 방식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조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게 된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통찰하고자 하는 새로운 질문방식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진리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경험적이고 복수적으로 사유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있는 것이기도 하면서 없는 것이기도 한 걸까요? 각자 전제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깨고, 편협한 관점을 의심해보기 위해 여러 다른 힘들과 싸울 준비가 다들 됐는지요? 질문과 시도!

아름다움, 정의로움이라는 것, 그것을 탈취하는 힘들, 소유하려 의지는 무엇이고, 그 힘들이 누구의 어떤 조건 속에서 표현되고 숨어있는지 질문하고 답하는 것만이 그 본질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물의 의미와 가치라는 것이 그것을 전유하고 있는 힘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아름답게 느끼는 어떤 힘, 어떤 의지를 묻는 것은 “비극적 의문”이며, 이 의문은 디오니소스를 향한다고 말합니다. ‘디오니소스의 비극적 의문’이 무슨 의미일까요? 생과 사, 생성, 변화, 소멸을 함께 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신이나 진리 그 무엇에 기대지 않고 그것들을 고독하게 목도하면서 염세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우리의 비극적 삶을 긍정으로 인도합니다. 부정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복수적인 긍정입니다. 니체는 가치 개념을 서로 대립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와 가치 속 권력의지가 “누가 원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다수의 하나이며, 다수를 긍정하고 다수에 의해 긍정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으로 안내합니다.

(* 세미나는 제 3 장 1~3번까지 진행했으나… 3번은 정리를 못했습니다ㅠ;;;)
전체 2

  • 2020-03-20 13:20
    말과 사유와 행동 속에서 그 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드러난 그 힘을 추동한 의지는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문제 삼는 니체의 질문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물을 때야말로 심판하고 부정하기를 그치고 그 복수적 의지들을 그것들 자체로 긍정할 수 있다는 대목이 재미있었구요~
    꼼꼼한 후기 감사합니다~~

  • 2020-03-26 00:09
    후기를 읽다보니 수업에 참석하고 싶은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행동유발적인 '기운(?)'을 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