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26. 不遷怒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6-03 11:33
조회
367
 

26. 不遷怒 (성난 마음을 옮기지 않는다)

 

哀公 問弟子 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論語 雍也)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자들 중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답하여 말씀하셨다. “안회라는 이가 배움을 좋아하여 성난 마음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단명(短命)하여 죽고 지금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배움을 좋아하는 이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논어 - 옹야)


공자가 다른 제자들을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안회는 더욱 특별했다고 한다. 잘은 몰라도 논어의 몇 구절만 읽어 보아도 안회에 대한 공자의 마음이 웬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배움을 좋아하는 이는 죽은 나의 제자 안회말고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공자에게 안회는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또 그런 제자 없이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 공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말했다시피 안회는 그는 배움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배움을 좋아하여 늘상 책상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배움을 좋아하는 안회는 '성난 마음을 옮기지 않았고, 잘못을 거듭하지 않았다'(不遷怒 不貳過). 不遷怒 不貳過(성난 마음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거듭하지 않는다). 이는 역시 반가운 문장은 아니다. 성난 마음을 옮기고(遷怒), 또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잘못을 또 반복해 버리는(貳過) 일들이 늘상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이 중 특히 不遷怒(성난 마음을 옮기지 않는다)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주자는 위 문장을 주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갑에게 화가 난 것을 을에게 옮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은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 가서 눈을 흘긴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기 보다 강한 자로 인해 겪은 괴로움을 자기 보다 약한 자에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푸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꼭 어떤 대상에게 무엇인가 나쁜 일을 당해서 화가 나고 그 화를 옮기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째서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경우도 자주 있다. '묻지마 범죄' 역시 그 하나는 아닐까. 어째서인지 화가 극도에 달하여 누구에게든 뭐라도 흠을 잡아 내 화를 풀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갑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을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화가 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 채로도 화가 나고 화를 낼 수가 있다. 생각해 보면 그 때에 무엇인들 이유가 되지 못할까. 내 탓, 니 탓, 망할 날씨 탓, 팔자 탓, 정치 탓…. '뭐든 걸리기만 해봐라'다. 이렇게 화가 나있고, 이 성난 마음을 옮길 준비를 단단히 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不遷怒'라니. 아무래도 배움을 좋아하는 자(好學者) 되기는 글러 먹은 것 아닌지.

화는 대체 왜 나는 것일까, 생각을 하다가 헛구역질 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성냄을 옮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종의 소화불량 탓(?)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어쩌다 무엇인가 먹어버렸는데 몸이 감당을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난리가 난다. 어떻게든 본래 상태로 되돌리려 꿱꿱거려보고, 부질없이 소화제를 찾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성냄을 옮기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일어난 불편한 마음이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는데 어떻게든 빨리 좀 편안해지고 싶은 것이다. 소화제도 없고, 뭐가 문제인지도 잘 모르니 헛구역질을 하듯 자기의 화를 뱉어버린다. 어떻게든 대상을 찾고, 이유를 만들어 이 불편한 마음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내어 버린다.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어째 이렇게 화가 나있나' 싶을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화를 풀어야겠다며 바락거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도 이래저래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어지는지도 역시 잘 모르겠다. 본래 마음은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귀속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남이든 짜증이든 원통함이든, 애착이든, 그리움이든… 그러한 마음들은 늘 내가 생각하는 해소 방법으로 해소되는 것 같지가 않다.

주자는 정자(程子)의 주석을 옮기며 이런 말을 한다. "안회(顔子)가 화를 냈다면 그것은 상대의 부도덕함 때문이지 그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옮길 것이 있겠는가." 안회의 덕성이 특별히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자는 거울의 예를 든다. 사물의 곱고 거친 것이 거울에 비친다. 그와 같이 상대의 이러저러한 모습이 자기에게 거울처럼 반사되어 어떤 생각을 갖게 하고 마음을 갖게 한다. 그에 맞게 응할 수는 있지만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은 아니다. 어째서 자신에게 비친 상대의 한 모습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은 근본적으로 대상의 단면에 결부된다. 그 단면에 놀라고 두려워하며 화내고 기뻐한다

한편 정자(程子)는 보다 근본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마음의 본래 상태와 그것이 갖가지 감정들로 요동치는 상태에 대해서 말한다. 그에 따르면 본체는 진실되고 고요하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마음이 바로 이 본체의 것이다. 그런데 형체가 생기면서 외부 사물과 접촉이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마음은 움직이게 된다. 이 때 칠정(七情. 喜, 怒, 哀, 樂, 愛, 惡, 欲)이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곱가지 정감이 치성하여 방탕해지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성난 마음, 애착함, 즐거움, 욕망함… 이 갖가지 마음은 본래 자기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자기의 본체는 진실되고 고요하다. 다만 형체를 갖고 존재하게 된 이상 외물들과의 상호작용을 피할 수 없고 그에 따라 갖가지 마음의 일을 겪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음의 일들, 본래 자기에게 난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서 난 것 역시 아니다. 나는 왠지 억울하지만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 조차 특정 대상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하니 누구를 원망하고 비난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애착할 수 있을까. 본래 마음이란 그런 식으로 옮겨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일종의 무능력자라면 그는 자기의 마음 상태가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익숙하고 편안한 마음 상태에 있고 싶어 화는 전가시키고, 쾌는 붙들고 싶어하게 된다.(아이고 모르겠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약한 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감당할 수 없는 자는 신에 기대어 해결책을 구하게 된다. '부디 이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기를', 일단 두려움에 가득 차 기도하게 된다. 타인에게 성난 마음을 옮기는 것이 이와 다를까. 화를 내고 있지만 실은 이 불편한 마음을 좀 가져가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말했듯이 칠정에 치달리는 마음이 본래 내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자기 것도 아닌 그 마음 때문에 그토록 난리를 치게 되나. 그것은 역시 익숙하고 편안한 마음 상태에 있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 자, 성냄을 옮기지 않는다. 그는 자기 것도 아닌 마음을 자기 것인냥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남을 탓하며 자신에게는 솜털같은 일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쓸 데 없는 환상 속에 자기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는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허위보다 참을 좋아하여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며 헛되게 힘을 빼지 않는다. 

不遷怒, 어째 글을 끝맺으며 엉뚱한 생각만 든다. 대체 0얼마나 많은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돈을 빌리는 것만 신세 지는 일이 아니다. 하룻밤 상대의 집에 묵고 가는 것만 신세 지는 일이 아니다. 내 온갖 감정들을 묵묵하게 받아주는 친구, 스승, 가족… 화를 그나마 덜 옮기고 살 수 있다면 바로 이들 덕이 아닐까. 이들이 실상 내 신인가.(-.-) 배우는 데는 게으른데, 성난 마음은 어디 함부로 옮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당분간 구제책은 역시 주변인들이다. 신세를 계속 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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