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33. 배움은 놀이다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7-28 16:48
조회
688
배움은 놀이다



요새 어느 생협에서 천자문 수업을 하고 있다. 초등학생 반인데 시작하고 보니 과반수 - 평균 출석자 6명 중 3명 - 가 초등 1학년이었다. 덕택에 무엇인가 ‘가르친다’고 말하기 민망한 상황이 자주 생긴다. 이제 8주가 되었는데 모두 함께 쓸 수 있는 글자는 ‘(天)하늘 천’! 하늘 천(天) 자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선 ‘졸라맨’이라며 좋아한다. 그것도 매주 똑같이……. 나는 어이없어 하지만 자주 그들의 취향에 응한다. 나도 모르게 공룡을 같이 그리며 “자, 여기까지만 쓰면 큰 공룡을 그려 줄게.”한다.(ㅠㅠ) 첫 주, 내가 앞으로 만나야 할 아이들 중 한글도 겨우 읽는 꼬맹이, 것도 남자 꼬맹이가 둘이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겠구나’ 했다. 그럼에도 종종 번민은 일어난다. 과외 선생 출신의 본성(?)이 나온달까. 글자들을 잔뜩 암기시키고 싶고, 바른 자세로 묶어둔 채(?) 문장의 뜻을 좀 새겨보게 하고 싶다. 하지만 뜻은 무슨, 교훈은 무슨.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하면 “남의 장점은 말하지 말라”로 읽고 마는 애들 앞에 매주 패배 중이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배우고 수시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 첫 구절이 보여주듯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은 기쁜 것이다. 이 기쁨은 배움이 마음에 젖어드는 중에 일어나는 것으로(程子曰 (...) 浹洽於中則說也) 배운 것을 수시로 익히는 일(時習之) 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때를 가리지 않고 또 때에 맞춰 익히는 일은 괴로운 일이 아니다. 참고 견뎌 어떤 경지에 도달한다는 목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자체 스스로 기쁨을 만드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더 보고 싶은 구절이 優游涵泳(우유함영)이었다. 五十有五而志于學으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구절(爲政04)의 주석에서 주자가 쓴 말이다.

優游涵泳(우유함영), ‘편안할 우, 놀 유 젖을 함, 헤엄칠 영’. 풀어보자면 ‘편안하게 놀고 푹 빠져 헤엄치다’가 된다. 涵泳(함영)이라는 단어를 읊조리고 있으면 저 물 속 깊은 어딘가를 헤엄치는 이를 상상하게도 된다. 푹 잠겨 자유자재로 헤엄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진다. ‘涵泳’이라는 글자는 미지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탐사하고 노닐고 싶다는 마음을 건드리는 것도 같다. 수영장 수영도 못하는 처지이지만 수영의 기쁨은 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어떤 장애도 모르고 목적지도 모른 채 헤엄치는 일의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 주자는 바로 이와 같은 일 - 優游涵泳 - 을 배움에 관련시킨다. ‘배우는 일만한 놀이가 있을까. 그만큼 자유로운 일이 있을까.’ 주자의 주석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優游涵泳에 대해 채운샘은 ‘배움이 자기의 우주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하셨다. 배움의 세계가 곧 나, 내 우주가 되는 것이라는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셨다. 배움이란 뭘까. 優游涵泳(우유함영)을 쓰는 자에게 배움은 이미 도달해야 할 과정은 아니다. 배움은 흔히 참고 견뎌야 할 어려운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優游涵泳(우유함영)을 말하는 이에게 배움은 이미 놀이다. 그리고 이렇게 실컷 노는 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배움의 목적이 성인(聖人)이며 성인이 되기까지 이런저런 수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열 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 자립하고 마흔, 쉰, 예순을 지나 일흔이면 의욕하는 바를 따라도 그것이 천지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논어》에는 이처럼 일종의 배움의 단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배우는 자를 위한 일종의 방편이다. 정자(程子)의 주석에 따르면 과정을 건너뛰고 한 가지를 제대로 완성하지도 않고 통달하려는 일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但爲學者立法 使之盈科而後進 成章而後達耳) 배우는 자의 욕심은 경계하며 배움에 선후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푹 잠겨 헤엄치기를 가만히 하는 어느 때인가 스스로도 모르게 갑자기 성현(聖賢)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한다.(참고 述而06 주석)

주자가 말하는 놀이(游)는 물론 放(방), 肆(사) 등과 같이 쓰이지 않는다. 자기를 잃고 사치하며 허랑하게 노는 일은 游자에 담겨있지 않다. 游於藝(유어예. 육예六藝에서 노닌다)에서 游(유)는 玩物適情(사물을 완상하여 성정性情에 알맞게 한다)으로 일상의 갖가지 사물·사건과 만나는 데 알맞게 한다는 뜻이 있기도 하다. 優游涵泳이 생각하게 하는 자유자재함 역시 ‘마음 내키는 대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것과 만나든 적합하게 응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적합함’과 같은 말이 나오면 괜히 경직되는 것이 있지만 游는 游이다. 주자에게 공부는 游, 자유로운 활동이며 그 자체 즐거운 일이다. 어떻게 배우고 익힐 것인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배울 것이 산더미 같아 겁이 날 것 같을 때조차 중요한 것은 ‘놀 수 있는가’가 된다. 욕심내지 않고 전전긍긍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놀 수 있을 것도 같다.

천자문 반 꼬맹이들이 《논어》에서 말하는 놀이(游)를 실행 중이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욕심이 없고 조급할 것이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배우는지에 관한 것이다. 아니 어떤 ‘배울 것’도 배울 것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자도 《천자문》도 꼭 붙들어 익힐 것이 아닌 덕에 그들은 멋대로 주무르고 장난치다 깜냥껏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다. 이렇게 허랑하게 배우는 일도 가능하겠구나, 생각했다. 사실 그들이 한자(漢字)를 배우고 《천자문》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정말 그저 1시간을 보낼 뿐인 것도 같다. 그런데도 어떤 꼬맹이는 “한자는 정말 멋진 글자에요.”한다. 배운 문장을 써서 선생님의 잔소리에 역습을 가하는 일도 있으며(-.-) 뜻은 모르겠으나 좔좔 문장을 외는 모습은 조금 기특하다. 배운다는 것은 뭘까. 천자문 반 꼬맹이들이 기특해 보일 때는 나도 좀 더 신나게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움은 놀이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충분히 가능한 말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배우고 있느냐는 그가 어떻게 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때때로 놀이를 지나치게 괴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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