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30. 배움이 견고하지 못한 까닭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6-30 17:15
조회
601
30. 배움이 견고하지 못한 까닭

《논어》에는 배움에 관한 구절이 많다. 《논어》의 첫 문장부터 배움(學)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은 우리의 통념과 같지가 않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며 실천과 분리된 무엇인가도 아니다. 배움은 언제나 자기 마음을 닦는 일과 관련된다. 한편 배움의 뜻이 이렇게 다르니 배움의 방법 역시 낯선 것이 많다. 어떻게 배워야 잘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훌륭한 스승, 교육기관, 배움을 둘러싼 분위기…? 모두 틀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읽은 구절에서는 다르게 답한다. 신중하지 않다면 배움은 견고할 수가 없다고 말이다.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厚重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움이 견고하지 못하다

앞에서 ‘신중하다’고 말한 것은 오늘의 문장 중 ‘重’에 대해서 간단하게 풀어본 것이다. 주자 샘은 ‘重’을 厚重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사실 重이나 厚重이나 사람의 어떤 면모를 나타내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글자를 단순하게 풀어 보자면 이렇다. 사람이 두텁고(厚) 무거운 것(重). 사람이 두텁고 견고하다는 것(厚重)은 물론 상상력을 북돋는다. 내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넉넉히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굳게 지킬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가 잘 배울 수도 있다,라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는가. 이것저것 구미에 맞는 것만을 취하려는 마음으로는 널리 배울 수가 없다. 또, 배운 바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까지 익힐 수 없는 자에게도 배움은 늘 위태로운 무엇이다. 이러하니 너른 마음과 굳은 마음인 자라야 비로소 배움을 견고하게 할 수 있지 않겠나.
격몽 수업에서는 重을 신중함 즉 행동에 있어 삼가함이 있는 것으로 풀었다. “輕乎外者必不能堅乎內”라는 풀이(주자)에서도 볼 수 있듯이 重은 행동거지가 가벼운 것 곧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것에 반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경거망동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 내 말과 행동이 가장 멋대로인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결국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아닌가. 의식하고 있진 못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고, 나 자신 역시 정말 잘 하고 있고, 일은 모두 뜻대로 될 것이고… 이와 같은 확신들 속에서 사람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부릴 수 있는 자가 많을 때 그러니까 어떤 권력을 얻게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모든 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사람이나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 함부로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重은 일종의 겸손함이라고 풀어볼 수도 있겠다. 자신을 의심할 수 있으며 낮출 수 있는 자, 그가 곧 重하다. 그가 경거망동에 자기를 내맡기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重) 곧 겸손함을 단순히 말과 행동을 아끼는 것은 아니다. 말과 행동에 주의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자기를 사리려는 마음이 말과 행동을 삼가게 한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또 귀찮은 마음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아끼게 만드는 일이 분명 있다. 물론 유가에서는 말이 많은 것보다는 차라리 적은 것 또 어눌한 것을 좋게 친다. 그렇다고 전전긍긍하며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올지를 두려워하며 행동하고 또 행동하기를 미루는 일을 重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그와 같은 경계심이 없는 자가 重하다. 자신이 바라는 상황과 바라지 않은 상황에 대한 경계심 속에 있는 자는 그에 끄달려 휘청휘청 할 뿐 굳게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논어》의 구절들은 자주 사사로운 마음과 곧 잘 싸운다. 자기 것을 지키려 하고, 내 이익을 챙기려 하고, 편한대로 상황이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 이런 마음과 싸운다. 군자의 厚重 역시 크게는 이런 맥락일 것이다. 계속 보자.
후중(厚重)하지 못하면 사람에게 위엄(威嚴)도 없다. 위엄이 없는 것 역시 견고한 배움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람에게 위엄(威嚴)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채운샘은 위엄(威嚴)을 時中으로 풀어주셨다. 때에 맞게 또 상황에 맞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위엄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엄은 단순히 자기 의도한 바를 밀어 붙이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의 굽신거림을 받는 것 역시 아니다.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갈 수 있고, 물러날 때 물러날 수 있는 모습이다. 낮추어야 할 때를 알고 또 힘을 써야 할 때를 아는 자다. 자신에게 온 어떤 상황에도 거리낌 없이 응할 수 있는 자가 위엄이 있다. 싫은 것도 많고 마땅치 않은 것도 많은 이는 까탈스러울 수는 있지만 위엄을 지키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어째서, 어떻게 위엄을 잃는가. 그의 처지가 나빠져서가 아니다. 자신이 고집하는 것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하지 못하고 또 위엄이 없다면 배움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의 문장의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평상시의 내 말과 행동이 내 배움과 무관하게 갈 수 없다. 평소에는 경거망동 하다가 특별히 무엇인가 배운다는 때에만 자기를 내려놓고 행동을 삼갈 수는 없다. 상황에 취사선택하기를 좋아하다가 배울 때에만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 견고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째서 배운 것은 쉽게 날아가버리는 것 같을까’라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무엇을 배우든 배우지 않든 살아가는 다른 태도를 기르고자 했던 것이 이번 문장의 핵심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논어》의 다른 문장 역시 마찬가지다. 배움을 말할 때 그것은 내 생활 전반, 말과 행동 전체를 걸기를 요구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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