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34. 소인(小人)은 근심한다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8-05 22:18
조회
635
34. 소인(小人)은 근심한다

마음속에 맹수를 품고 돌아다니면서 환락에 빠지거나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끔찍한 자들이 있다. 환락이라고는 했지만 그것도 자기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이고. - 니체,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다. 꽤 강렬했는지 종종 생각이 난다. 니체에게는 살아있는 자가 그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방식으로밖에 살지 못한다는 점이 큰 고민이었던 것 같다. 어째서 자기를 괴롭히는 방식으로밖에 살지 못하는 것인가, 어째서 사지(四肢)를 찢고 천상의 삶을 열망하는 것이 존재 방식일 수 있는가. 이런 문제가 니체에게는 중요했던 것 같다.

배운 것에 따르면 생의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는 자가 저 천상세계를 열망한다. 범박한 말일 수도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이 세계를 인정할 수 없는 자가 저 천상세계를 몽상하며 삶을 견딘다. 물론 의지처는 꼭 천상세계만이 아니다. 신, 사제, 진리, 사랑… 사람은 그 무엇에도 자기 바람을 투사하며 의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지처를 찾게 되는 것을 한 사람의 무능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돈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더 가져야 하고, 이것이 필요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갖가지 말들 속에서 내 삶은 위태롭게만 다가온다. 결국 끝없이 불안하고 막연하게 두렵다. 필요한 게 내게 없어 불안하고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확실히 알 수 없어 두렵다. 제대로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하다. 오늘도 내일도 그러하다. 덥고 두렵고 피곤하다. 이쯤되면 이번 생에 행복하기는 틀린 것도 같다.

《논어》에는 종종 군자의 용모 혹은 공자의 용모에 대해서 나온다. 그 모습이 내 것과는 정말 다르다.

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
군자는 편안하고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근심한다.
(군자 탄탕탕 소인 장척척)

발음에서도 느껴진다. “군자 탄탕탕(君子 坦蕩蕩)”! 군자는 편안하면서도 유쾌하고 힘이 넘치는 것 같다. 그런데 “소인 장척척(小人 長戚戚)”, 어째 읽고만 있어도 힘이 빠지는 것 같지 않는가. 발음도 축축하다.(좀 오바인가.) 어쨌든 이 구절의 묘미는 한 사람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졌든 어떤 상황에 있든 편안하고 여유 있는 자가 있다.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늘 근심하는 자도 있다. 군자와 소인은 이렇게 갈린다. 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 한 사람이 속한 결정적 자리는 그의 몸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지옥에 있는지 천국에 있는지도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주자는 짧게 주석한다.

“군자는 이치에 따르기 때문에 마땅히 (몸이) 펴지고 (마음이) 편안하다. 소인은 외물에 부림을 당하기 때문에 근심이 많다.”

소인이 늘 근심하는 것은 그가 나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 아니다. 좋은 때가 와도 그는 근심한다. 왜냐. 그가 외물에 부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사제에게 자기를 맡기듯 부모에, 국가에 자기를 맡기고 맹신하는 일이 가능하다. 주어진 상품을 통해 행복하고자 하는 일도 가능하다. 엊그제 절차탁마 수업을 들으면서는 아무래도 지금 시대에 외물에 부림당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절차탁마 수업 때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는 그가 속했던 땅으로부터 이탈된 존재다. 자신이 속해있던 땅과의 결속을 상실한 자가 자유롭게 떠돌며 스스로를 팔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자유란 이런 것이다. 사람은 이전에 자신이 묶여 있던 바 - 땅, 가족, 옛 가치 등에 더 이상 구속당하지 않는다. 대신 살기 위해 그는 어떻게든 무엇인가에 자기를 팔아야 한다. 공장, 학교, 국가… 어디든 다시 속하여 먹고 살기 위해 그는 그것이 요구하는 것들에 스스로를 맞추고자 한다. 학교 교육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이 한 사회에서 그를 가치 있는 자 곧 고용될만한 노동자로 승인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그것은 그가 좋은 부모,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이라는 것까지도 결정한다. 국가는 바로 그렇게 자유롭게 된 개인을 관리한다. 자유롭게 되었지만 살기 위해 - 먹고 사는 것 뿐만 아니라 한 사회에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주어진 요구에 자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외물에 부림당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주어지고 요구하는 것들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에 자기 바깥의 것에 부림당하지 않기란 정말 어려운 일로 다가온다.

군자는 이치에 따라 살아간다. 이치는 외물이 아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천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군자의 방식이다. 그가 순응하는 이치란 곧 자연의 법칙이다. 천지자연의 차서요 리듬이다. 군자는 자연과도 같이 생노병사와 춘하추동에 따라 살아간다. 그것이 그를 늘 편안하게 하고 여유가 있게 한다.

《논어》의 시대에 시장을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자는 자신을 내다 파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論語》, 學而), 이 말이 군자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이미 타인의 시선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논어》를 읽어보면 부모나 친구, 군주 등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효(孝)만 해도 그렇다. 지금 사람들에게 자기를 괴롭게 하고 억압하는 행동방식으로 여겨지는 것이 효다. 하지만 군자에게는 자기를 가능하게 한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군자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가 도리어 외물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외물에 부림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속한 복잡한 관계, 그 자신의 독특한 리듬, 그 속에서 겪지 않을 수 없는 갖가지 일들 속에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가치를 잃을까, 인정받지 못할까, 나쁜 처지에 처할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기만 하여도 할 수 있는 바도 많고 누릴 수 있는 일들도 많지 않나.

그런데 지금은 이러나 저러나 근심스럽다. “長戚戚(장척척)”! 내게 무엇이 진짜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기도 어렵다. 생각하려고 하면 그저 멍해진다. 그 와중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말로 머릿속은 시끄럽다. 내 말인지 남의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말들이 끊임없이 웅성거리는 것 같다. 그 말들 하나 하나로 속이 타는 것은 어떻게든 나를 좀 팔고 싶어서는 아닐까. 천상세계를 호출하는 것은 나의 두려움이다. 헛것에라도 나를 팔고 싶게 하는 것은 내 불안이다. 불안이 부르는 망상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시 부르는 근심들… 이 악순환을 그만하면 좋을 것 같다. 어째서 근심스러울 일을 스스로 자초하나. 소인은 스스로 근심하는 자다. 하지만 많은 경우 헛되이 근심만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내 불안과 갈망이 만드는 근심 속에 더 오래 머물고자 욕망하는 경우도 많다. 이상하지만 그렇다. “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 (군자 탄탕탕, 소인 장척척)”.
전체 2

  • 2016-08-06 12:17
    수행자들이 괜히 '집중'을 강조한 게 아닌듯... 결과물에 대한 예측이나 계산 없이, 지금 당장 하는 일에 걍 집중하는만큼 웅성대는 소리들이 무력해지는 듯. 근데 이 또한 무진장 연습이 필요하니, 어려운 일이로세>.

  • 2016-08-06 12:29
    공자=공선생님(자=선생님). 고로 공자 샘=공샘 샘. 동일사례 : 역전 앞, 닭도리탕... 또 머가 있을까나?ㅋ 글고 '인부지이불온'의 온자는 따뜻할 온이 아니래는데도 참 고집스럽게 틀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