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8월 26일 3학기 5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현화
작성일
2021-08-30 01:35
조회
136
<불티모아> 8263학기 5주차 수업 후기

이번 주도 ZOOM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동안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던 은순 샘, 설 샘이 참여해서 반갑고 수업 분위기도 더 화기애애했답니다.

 

중론17품 업과 과보에 대한 고찰

 

제17품은 인간의 업(karma)과 그 과보를 다루는데, 총 33게송으로 분량이 많아서 이번 수업은 17게송까지 토론했습니다. 아비달마 논사들은 업과 과보의 결합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에 윤회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업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1~5게송에 잘 드러납니다.

 

1게송) 자아를 제어하는 마음과 남을 돕는 자애로운 마음은 법이다.

그것은 사후와 생전에 받을 과보의 씨앗이다.

법은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며, 그와 같은 마음에 따라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단어는 ①자상(自相)을 유지하고, ②악취에 가는 것을 막고, ③오취 윤회에 떠도는 것을 막는다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공을 설하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자상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왜 법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다음에 채운 샘께 질문하기로 했습니다.

 

2게송) 최고의 선인께서는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을 가르치셨다.

업의 많은 종류를 구별하여 가르치셨다.

최고의 선인은 세존을 말하며 사업은 마음에 속하고, 사이업은 몸과 말에 속한다고 합니다.

 

3~5게송에서는 몸(身), 말(口), 마음(意)의 3업을 다시 7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선하고 불선한 말, 선하고 불선한 동작, 선한 무표(無表)의 상을 지닌 것, 불선한 무표의 상을 지닌 것, 공물에 따라가는 복, 공물에 따라가는 비복, 사(思)가 업을 표시하는 7법이라 합니다. 여기서 업을 체계적으로 세분화한 구사론자의 이론이 뭔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6게송) 업이 이숙 때까지 지속한다면, 그것은 상주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소멸한다면, 소멸한 것이 어떻게 과보를 발생시키겠는가?

나가르주나 논사는 위에서 말한 7종의 업과 관련해 그 업이 이숙 때까지 지속하는가? 또는 발생한 직후에 소멸하기 때문에 지속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이런 상주성과 단멸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구사론자(경량부)는 7~11게송으로 대응합니다.

 

10게송) 마음으로부터 (마음의) 상속이 발생하고,

(마음의) 상속으로부터 과보가 발생하기 때문에

업보다 나중에 존재하는 과보는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11게송) 10가지 청정한 업도는 법의 성취 수단이다.

5가지 욕락은 생전과 사후에 받을 법의 과보이다.

구사론자의 주장에 대해 나가르주나는 그렇게 분별할 때 커다란 오류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분별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12게송), 부처님과 독각과 성문들이 말씀한 타당한 견해를 말하겠다(13게송)고 합니다.

 

14게송) 불실(不失)(차용)증서와 같고, 업은 빚과 같다.

그것은 계()로서는 네 가지이며, 본성에 있어서 무기(無記)이다.

15게송) 제거에 의하여 제거되지 않는다. 또는 수습에 의하여 제거된다.

그러므로 불실에 의하여 업들의 과보는 발생한다.

업이 발생할 때 그 업은 없어지지 않는 불실(不失)이라서 업을 지은 자에게 차용증서와 같고, 그것을 소유한 업은 빚과 같다고 합니다. 업은 수행에 의해 소멸할지라도 그것의 불실이라 불리는 다른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업을 지은 자는 불실법을 원인으로 삼아 발생한 과보에 의하여 속박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앙굴라말리는 999명의 사람을 죽였지만 부처님을 만나 살인을 멈추고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어도 수많은 살인의 업보로 인해 결국은 처참히 돌에 맞아 죽습니다. 앙굴라말리가 수행에 의해 사람을 죽이는 업은 제거했지만, 불실인 과보는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업보를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15 게송에서 불실인 업의 과보가 수행에 의해 제거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앙굴라말리의 과보는 어찌 된 것인가? 그가 살해당한 것은 업의 과보가 아닌가?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라 의견들을 나눴지만 아리송해서 이것도 채운 샘께 질문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업과 과보에 대한 아비달마 논사들의 일반적인 견해가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오늘 토론을 마무리했습니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나가르주나 논사의 논리를 명쾌하게 이해하고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될까요? 에효~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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