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9월 2일 6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구슬
작성일
2021-09-06 22:01
조회
146
<불티모아>의 6주차 수업은 계속되는 4단계로 인해 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줌으로 명상도 하고 낭송도 하며 오프 모임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중론 토론은 지난 주에 이어 “제17품, 업과 과보에 대한 고찰”의 후반부(18게송에서 33게송)를 다루었습니다.

제17품, 업과 과보에 대한 고찰

21게송

업은 왜 발생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소실되지 않는다.

22게송

만일 업이 자성에 의하여 존재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상주자일 것이다. 또한 업은 (타자에 의하여) 지어지지 않을 것이다. 상주자는 (타자에 의하여)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업은 ‘발생’하지 않는다. 업은 어떤 동일한 것들의 변화 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발생’하기 않기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만일 업이 자성을 가진 실체라고 한다면 업은 어떠한 변화도 없이 상주이다. 그리고 자성을 지닌 것이기에 다른 것에 의존하여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3 게송

만일 (타자에 의하여) 지어지지 않는 없이 존재한다면, (타자에 의하여) 지어지지 않는 (업)으로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 경우에 비범행(非梵行)을 짓는다는 오류가 따라붙을 것이다.

24게송

모든 세간 관습과 모순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복을 짓는 자와 악을 짓는 자를 구별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게 된다.   

업이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상주자’라면, 이것은 세간 관습에 크게 모순된다. “만일 짓지도 않은 업이 존재한다면 다른 사람이 지은 죄인데 그 과보를 이 사람이 받게 되고, 다른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는데] 이 사람이 죄가 있는 꼴이 되어 세속의 법도를 파괴하게 된다”(김성철, [중론] 281). 다시 말해, 세간에서는 흔히 선행을 쌓아 복을 짓는 자와 악행을 쌓아 악을 짓는 자를 구별하는데, 업이 행위를 하는 사람(타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업은 별개로 존재하고 이런 경우, 아라한 조차도 자신이 짓지 않은 악행으로 인해 비범행을 저지른 것이 되고 그는 열반에 달할 수 없게 된다.

게송26

업은 번뇌를 본체로서 소유한다. 진리의 관점에서 번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진리의 관점에서 번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리의 관점에서 업이 존재하겠는가?

업은 번뇌들을 원인으로 삼는다. 그러나 진제의 관점에서는 번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용수는 “정부정(淨不淨)과 전도(顚倒)에 연하여 존재하는 (번뇌들은) 자성에 의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번뇌는 분별망상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번뇌는 실체가 없다. 번뇌가 실체가 없을 때, 업 또한 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

[묻는다] (대론자의 주장)

업은 자성에 의하여 확실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원인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원인이 없다. 거북의 털로 만든 옷에 (원인이 없는 것)처럼. 그러나 업에는 번뇌들이라는 원인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명에 연하여 행들이 발생하고, 취에 연하여 유가 발생한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그러므로 업은 자성에 의하여 확실히 존재한다.

대론자의 주장이다.  위의 게송에서 대론자에 대한 용수의 논박이 나왔지만 대론자의 논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대론자는 업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업의 ‘원인’이 있기에 업이 실재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원인이 없다. 또한 대론자는 12연기를 인용하며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을 실체로 해석한다. 여기서 헷갈리는 것은 대론자들은 ‘자성’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가 자성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은 원인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자성은 타자에 의존하지 않기에 자신 이외의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다 (용수는 이 부분을 계속해서 지적하며 대론자의 논지가 타당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대론자의 주장을 보며 왜 저렇게 매번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내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착잡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이 모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때로 각각의 원인과 상황을 파악하고 고려하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상황에 의해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여러가지 원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고, 상황과 그 일을 겪는 사람들도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으니 우리가 믿고 있는 사건의 실체란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중생인 우리의 눈에 사건은 마냥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집착이 우리를 에워쌀 때 우리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탐진치에 의해 우리는 계속해서 업을 쌓고 업의 과보를 받는 것 같다. 업은 공(空)하지만 분별망상에 빠질 때 우리는 아지랑이를 돌덩이 보다 무겁게 느끼는 것이다.

중론을 공부하며 우리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말을 매번 듣는다. 그럼, 공하다는 것이 진정 무엇일까? 일상에서 공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윤지샘이 수업 말미에 한 말이 울림이 깊었다. 윤지샘은 탐진치가 공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촘촘한 사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의 탐진치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감정을 느껴서 무엇을 취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 있고 그에 대한 나의 분노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용하는 감정과 내가 생각하는 대상이 여러 원인과 조건 등을 연하여 일어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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