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3학기 1주차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9-15 11:56
조회
138
 

 

 

절차탁마 서양철학 3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학기 저희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과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습니다. 고대에서 출발했던 여정이 스피노자의 17세기를 거쳐 어느새 19세기 20세기로 들어왔네요. 주제는 앎과 권력 그리고 계보학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과연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역사적이고 생성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쉽지는 않겠지만 1월에 시작해서 어느새 9월도 지나고 있으니 끝까지 달려가보아요! 그런데 첫 시간은 다소 단촐하게 시작하게 되었네요. 저와 훈샘과 수경샘 이렇게 셋이서 오붓하게 읽고 외우고 떠들며 니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갔습니다.

오전에는 그 유명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을 함께 낭송하고 암송했습니다. 같이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읽어가니 전에 슥 읽을 때와는 다르게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저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교량이라는 점에 있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는데요. 그러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어떠한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하나하나 노래합니다. 암송했던 것을 여기에 조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랑하노라.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는 영혼을 지니고 있는 자를. 누군가가 그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않고 되갚지도 않을 자를. 그런 자야말로 베풀기만 할 뿐, 자신을 보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주사위놀이에서 행운을 잡았을 때 부끄러워하며 ‘나 사기 도박사가 아닐까?’하고 묻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파멸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행동하기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을 던지고 언제나 자신이 약속한 것 이상을 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자신의 몰락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다가올 세대를 정당한 것으로 맞이하고 지난날의 세대를 구제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현재를 살고 있는 세대를 위해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신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의 신을 응징하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그 신의 노여움을 사 파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상처를 입고도 그 영혼이 심오하며, 하찮은 사건으로도 파멸할 수 있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기꺼이 저 교량을 건너고 있는 것이니.”(<차라투스트라>, 22쪽)

자신을 보전하려 하지 않고 또 준다는 생각도 없이 내어주는 자, 자신의 행운을 부끄러워하며 자문하는 자, 했던 말보다 더 많이 지켜내는 자, 하찮은 사건으로도 파멸할 줄 아는 자. 니체가 그리는 이런 덕들은 하나하나 곱씹을 만한 것 같습니다. 교량이라는 말도 그렇구요. 이쪽이나 저쪽이 아닌, 이전의 자신과 그것을 극복한 어떤 모습(위버멘쉬) 사이에서 계속 다른 존재로 변해가고 넘어가고 있는 존재, 스피노자의 표현으로는 이행 중인 신체가 바로 교량이겠지요. 그런 이행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단지 ‘해보자’하고 결심한다고 뭐가 변하지 않지요. 지난 학기에 배웠듯, 더 적합한 방식의 인식, 달리 말하면 신체의 변용 역량을 크게 하는 인식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으로써 이전의 관념들이 부적합하고 잘려나가고 혼동되었음을 철저히 발견해가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니체는 그 과정을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라고 말했죠. 근대인들의 행복, 덕, 동정, 평등, 복지 등의 지고한 가치들을 우리는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도돌이표죠. 아는데 그렇게 살아지진 않는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인식과 정서에 있어서의 단계적이고 빈틈없는 기하학적 매뉴얼을 보여줬다면, 니체는 그것을 시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 풍성하게 펼쳐내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니체에게 체계적 분석이나 디테일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너무나 디테일하기 때문에 사상사에서 그 이전까지 한 번도 제기된 적 없었던 질문을 던지기에 이르죠. 그것은 진리의 가치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가정했는데,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가? 왜 불확실성을 원하지 않는가? 왜 심지어 무지를 원하지 않는가?”(<선악의 저편>, 1절, 15쪽) 왜 인간은 진리를 욕망하는가? 이것이 이번 학기 저희가 안고 가게 될 질문입니다.

 

오후에는 <들뢰즈의 니체>에 나온 니체의 생애를 함께 읽고, 과제로 읽어온 슈테판 츠파이크의 <니체를 쓰다>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니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떻게 살았을까? 그의 철학은 어떤 삶의 여정에서 녹아 나왔을까? 그는 얼마나 아팠던 것일까? 아프다고 해서 이렇게 될 수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던져가며 매 챕터마다 저희의 생각들을 나눴는데요. 셋이서도 이렇게 오래도록 이야기할 수 있구나 하고 조금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저희는 니체의 ‘운명애’라는 것이 어떤 차원인지 이해해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가령 <니체를 쓰다> 17페이지에 인용된 니체의 말, “우리가 운명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무슨 말일까요? 운명이라함은 우리가 기껏 형성한 경험과 이해의 바운더리에 들어오지 않는, 예상과 기대 바깥에서 덮쳐오는 변수, 미지의 사건, 불가해한 힘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우연이나 끔찍한 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요. 아무리 막으려 해도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그 모든 낯선 지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물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전의 관념들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단독적이고 실체적인 현상으로 대상화시켜서도 안 되지요. 다시 말하면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서 분별적인 것으로 나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소유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츠파이크는 니체가 “종국적 의미에서 진리는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54쪽)고 말합니다.

저희는 니체와 그의 병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습니다. 고통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정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니체의 제자이자 연인(짝사랑)이었던 루 살로메는 니체가 병에서 회복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삶을 얻게 되어, 몇 번의 생을 살아냈다고 말하는데요. 저는 새로운 삶으로서의 건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건강하게 된다는 것은 일반적 삶의 상태 이상을 지닌다. 그것은 변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보다 확장된 상태로서의 상승, 고양, 정화를 의미한다.(...) 병을 앓은 뒤에 오는 두 번째 건강, 맹목적으로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열망에 따라 강력하게 억눌러서 얻어지는 건강이 둔감한 쾌감이나 평소의 건강보다 천 배는 생동적이다. 수없는 한숨과 절규, 위기를 거쳐서 충분히 ‘경험되고 정복된 건강’이야말로 건강의 참된 의미인 것이다.”(47쪽)

니체가 말하는 두 번째 건강은 확실히 저희가 아는 (수지에 의한) 정상상태로서의 건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고, 느끼는 방식뿐 아니라 생각의 방식까지 전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앓을 수 있을지, 감탄하는 일은 잠시 미뤄두고, 다음 시간부터는 그런 니체의 사유를 함께 더듬어가는 일을 시작해봅시다! 명절 잘 보내시고 9월 26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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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5 14:24
    분명히 알고 있던 구절들인데 이렇게 접하니 또 신선하고 강력하게 다가오네요. 준다는 생각도 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 말한 것 이상을 행한다… 완전 저랑 반대인 것 같아서 문장들이 후벼 파는 듯한 느낌! 어서 다음 시간에 합류하고 싶네요. 민호의 정성스런 후기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