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3학기 세 번째 시간(10.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9-29 13:14
조회
144
《선악의 저편》 1장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니체가 비판하는 진리, 진리에의 의지란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 의식적으로 진리를 찾아 헤매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우리 자신 안에서도 진리에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니체가 말하는 진리는 도그마와 같은가? 그래서 니체는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진리를 향해 욕망한다고 말하는 걸까? 무엇 하나 딱 잘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입니다. 그렇지만 니체가 여기서 관점의 근본적인 전환을 실행하고 있음은 분명해보입니다. 과거에 철학자들은 인식행위를 ‘진리’라는 불변항과의 관계 속에 자리매김 시켰습니다. 인식의 궁극적 목적인 진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한 인식활동 자체에 대해서, 그 의미에 대해서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인식 충동을 지니고 있고 참된 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은 철학자이다, 라고요.

그런데 니체는 ‘진리’라는 불변항을 괄호 칩니다. 이데아, 형상, 물자체, 본질, 일자(一者) 등등. 사람들은 ‘진리’에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붙여왔습니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각자 자신의 진리에 관해 말하는 이 모든 철학자들, 형이상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가치의 대립에 관한 믿음’입니다. 가치의 대립. 예를 들면 우리가 ‘선’, ‘악’이라고 부르는 것 각각에는 각기 상이한 본질이 배속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이 덧없는 세계 너머에 독자적인 기원을 지닌,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은 참된 것 그 자체가 존재하리라는 믿음이죠. 그런데 이건 말 그대로 ‘믿음’입니다. 니체는 이 전제를 의문에 붙입니다. “도대체 대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형이상학자들이 보증했던 저 대중적인 가치평가와 가치 대립은 아마 단지 표면적인 평가가 아닌지”(17쪽)를 니체를 물음으로 남겨 둡니다. 그렇습니다. 민호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고 이야기해준 것처럼, 사실 우리가 ‘차갑다’, ‘뜨겁다’라고 부르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은 각각 ‘차가운’ 본질과 ‘뜨거운’ 본질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양적인 차이를 나타낼 뿐이고, 인간의 신체와 인간 신체를 이루는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순간에 차갑거나 뜨거운 것으로 ‘경험될’ 뿐입니다.

‘진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간에 ‘가치의 대립’을 전제하는데, 니체가 의심하듯 가치의 대립이라는 것이 실은 인간의 ‘믿음’일 따름이라면, 우리는 정당하게 ‘진리에의 의지’를 심문해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가정했는데,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가?”(15쪽) 니체는 “의식적인 사유의 대부분도 본능의 활동으로 간주해야 한다”(18쪽)고 말합니다. 모든 논리와 그 움직임의 독단성 뒤에도 ‘가치평가’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아무리 고차원적인 인식 활동일지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보편적 진리를 향해가는 순수한 이성의 운동이 아니라, 매우 독특한 생리적 요구와 스스로를 긍정하고 강화하려는 힘의 표현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식행위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전제들, 즉 확정된 것은 불확정적인 것보다 가치가 있다거나 가상은 진리보다 가치가 없다는 전제들 또한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 같은 존재에게 필요한 일종의 어리석음”(18쪽)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의 철학이 스스로를 믿기 시작할 때, “이 철학은 항상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며, 달리 할 수 없다. 철학은 이러한 폭군 같은 충동 자체이며, 힘에 대한 가장 정신적인 의지이고, ‘세계를 창조하려는’, 제1원인을 지향하는 가장 정신적인 의지이다.”(24~25쪽) 우리의 사유는 진리라는 추상적인 보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유를 하는 현실적인 힘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니체는 우리더러 어쩌라는 걸까요?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요? 참된 것과 가상의 것의 구분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는 걸까요?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여전히 ‘차가움’이라는 외부 대상 그 자체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차갑다’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의 원인으로서의 행위자’는 인식의 허구라는 니체의 주장에 동의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다양한 상황들과 마주침들과 변용들 속에서도 변치않는 ‘나’에 대한 관념을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니체는, 사유를 엄숙하고 진지한 진리추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형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모든 진지함과 싸우는 것, 진지함의 배후에 있는 독단주의와 싸우는 것.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탈신비화하는 것. 웃음과 가벼움으로 삶 위에 군림하는 모든 이상들, 가치들, 관념들에 맞서 싸우는 것. 이것이 니체가 진리에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1, 2학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3학기의 텍스트들은 특히 더 ‘철학함’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철학이 향해가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묻는 일반적인 물음들을 물리치고 지금 사유 활동이 어떤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떠한 가치들과 의미들을 생성해내고 있는지, 세계를 어떻게 구성해내고 있는지를 질문합니다. 우리도 우리 수준에서 철학함이 무엇인지, 그동안 각자는 철학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또 니체를 읽고 어떤 지점들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점검해가며 책을 읽어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럼 일요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선악의 저편》을 90쪽까지 읽고 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챙겨오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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