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세미나

2월 18일 나들이 세미나 공지 "n승의 역량으로 읽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2-05 16:56
조회
222
안녕하세요~ 벌써 나들이 세미나 시작한지도 3주가 지났습니다. 매주 10쪽 정도 강독하는 세미나를 처음 해보는지라, 분량이 너무 적은 것은 아닌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진행해보니,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재밌네요! 매 주 읽는 분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3시간도 짧게 느껴집니다! 채운쌤은 문장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큰 맥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고 하셨지만, 사실 그게 잘 안 됩니다. 껄껄. 그래도 문장들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매 시간 즐겁게 보내고 있답니다.

3주가 지났고 저희는 아직 서론 3절까지밖에 읽지 않았죠. 책을 다 읽기까지 구만리가 남았네요. 그러나 지루하기보다 기대됩니다. 내년 1월 초 <차이와 반복>의 마지막 쪽을 넘기고, 저희는 들뢰즈의 사유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두근두근합니다. ㅎㅎ

다음 주는 설연휴로 휴강입니다. 그 다음 주인 2월 18일 저녁 6시에 세미나 시작할게요. 그리고 마침 시간도 좀 더 넉넉하니, 정리해야 할 양도 늘려보죠. 4절까지 읽고 그동안 읽었던 내용에서 반복이 왜 일반성과 다른지, ‘행동의 관점’, ‘법칙의 관점’, ‘개념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해오죠. 이번에 채운쌤의 정리 강의를 들으면서 각자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으시죠? 모두의 과제가 기대됩니다!

어제는 채운쌤의 정리 강의가 있었습니다. 들뢰즈가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차이와 반복>을 썼는지, ‘차이’와 ‘반복’이 어떤 사유를 비판하는지, 무엇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지 등등 꼭 붙잡아야 할 큰 맥락을 잡아주셨습니다. 물론 아무리 자세하게 맥락을 잡아주셔도 까먹고야 마는 게 저희의 대단함이죠. 왜냐하면 채운쌤으로 하여금 ‘n승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추동하기 때문이죠! ㅋㅋㅋ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맥락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시간에 대한 문제제기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1968년에 출간됐습니다. 같은 해에 박사학위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 <의미의 논리>가 출간됐죠. 개인적으로는 <의미의 논리>도 당연히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쨌든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은 ‘시간’입니다. 여기서 시간은 저희가 시계를 보고 묻고 답하는 단위로서의 시간이 아닙니다. 존재의 실존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의 시간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세계와 나의 관계라든지 사유 활동이라든지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가령, 전통적 인식론적 철학에서 인식은 대상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과 같은 활동으로 인식됐습니다. 책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그 책을 책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통적 인식론에서는 책을 책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동일한 무엇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됐습니다. 그게 ‘생각하는 나’의 동일성이든, ‘한결같이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의 동일성이든, 동일성에서 출발하여 동일성으로 귀결되는 철학이죠.

들뢰즈가 보기에, 동일자를 상정하는 철학에는 시간과 공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고작해야 A 위치에 있던 물건이 B 위치로 옮겨질 때까지의 이동한 거리가 시공간이고, 이는 동일함을 발견하고자 하는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 앙리 베르그송 등 이미 단선적인 축, 공간적인 이미지로서의 시간을 넘어서고자 했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들뢰즈는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간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했습니다. 즉, 동일자가 인식하는 세계를 전제하는 사유가 아니라 인식 자체가 주체와 세계를 구성하는 사유를 하려고 했습니다. <차이와 반복>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차이와 반복, ‘다름과 공존하는 사유

들뢰즈는 차이를 얘기하기에 앞서 반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현재 저희가 읽은 서론 3절까지의 내용에서는 ‘반복이란 이런 게 아니고, 이렇게 봐야 돼’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주 큰 맥락만 정리하면, ‘반복은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은 일반성과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복이 동일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되풀이한다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한다”고 했습니다.(24) 토론할 때는 알 것 같았는데, 어제 다시 강의를 들으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어떤 세계, 어떤 철학을 그리려고 했는지 생각하니 감이 조금 잡힌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세계를 일반성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습니다. 일반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동일자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동일자로 가득한 세계에서는 ‘다름’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실천이 결여돼있습니다. 가령, ‘말이란 달리는 동물이다’라는 일반성 속에서는 ‘밭 가는 말’과 공존할 수 있는 지점이 없습니다. 그것을 말이 아니라고 배제하거나 달리도록 강제하는 것이 선(善)이자 도덕으로 여겨집니다. 즉, 동일한 ‘말’에 부합되지 않는 이질적인 말들을 모두 배제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들뢰즈가 포착한 세계는 일반성으로 척도화될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우리가 규정한 일반성들을 항상 흘러넘치는 힘으로 가득했습니다. 들뢰즈는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름다운 도덕 대신 선별하고 추방하는 힘으로 가득한 세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이를 액티브한 힘과 리액티브한 힘, 포지티브한 힘과 내거티브한 힘으로 구분했죠. 어쨌든 일반성이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힘으로부터 실존을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일반성에 의한 규정을 넘어가는 것이 들뢰즈가 새롭게 제기한 인식론입니다. 여기서는 개체의 실존을 더 명확하게 규정하는 척도 같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일반성에 입각해 도덕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에 입각해 윤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맹자》 〈진심 하〉 6장에 “순임금이 마른 밥을 먹고 풀을 먹을 때는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더니, 천자가 됨에 이르러선 그림을 수놓은 진의(袗衣)를 입고 거문고를 타며 요임금 두 딸의 시중을 받으니 마치 본래부터 그런 듯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순임금은 환경이 바뀌어도 매우 편안하게 “마치 본래부터 그런 듯” 때에 맞게 살았습니다. 빈천한 평민시절부터 고귀한 임금으로 살기까지 일관되게 산 것이죠. 이는 순임금이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도덕법칙을 발견해서는 아닙니다. 《맹자》 안에서는 성선(性善) 혹은 마음의 차원에서 해석했는데, 들뢰즈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순임금이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규정을 고수했다면, “마치 본래부터 그런” 것처럼 살지는 못했겠죠.

앞으로도 계속 품고 가야 할 질문이지만, ‘무엇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고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그는 반복될 때, 그 운동에서 표출되는 것은 자아 같은 것이 아니라 그런 자아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고유한 힘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존재의 고유한 힘을 되풀이할 수 있을까요? 거칠고 추상적인 질문이지만, 이 질문 덕에 다른 철학에서 배웠던 것들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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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2-16 10:37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한다'는 말 엄청 알쏭달쏭하면서도 멋있네요. 언젠가 저도 <차이와 반복>을 꼭 읽어보고 싶슴돠. 앞으로 후기를 통해 간접체험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