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2학기 열 한 번째 시간(7.9)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07 11:17
조회
192
지난 시간에는 《성의 역사》 3권의 4장, ‘육체’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푸코는 이 챕터에서 갈레누스를 비롯한 의사들의 텍스트들을 참조합니다. 푸코가 성에 관한 도덕적 문제화의 역사를 탐구하려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접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대의 성에 관한 도덕적 문제설정을 분석하기 위해 양생술의 차원을, 그리고 나아가 육체에 대한 앎의 차원을 경유한다는 것. 푸코는 원래부터 신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걸까요?

《감시와 처벌》에서 그는 “현대 사회에서 처벌제도가 신체에 관한 일종의 ‘정치경제학’ 속에서 재정립”(55쪽)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 제도가 폭력적이거나 피 흘리는 징벌에 호소하지 않는 경우에도, 혹은 감금이나 교정을 행하는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신체”(56쪽)라고 말합니다. 푸코의 관점에서 신체는 욕구와 욕망의 본거지, 생리과정과 신진대사의 장소, 미생물 혹은 바이러스의 공격목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정치의 영역 속에 들어가” 있으며, 따라서 “권력관계는 신체에 직접적 영향력을”(56쪽) 가합니다. 신체에 대한 정치적 공격!

권력은 주체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 사이에서 생산되고 또 관계들을 형성한다고 말할 때, 또 권력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고 말할 때, ‘권력의 미시물리학’을 말할 때 푸코는 권력관계의 목표물이자 거점이기도 한 신체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지닌 이성적 주체들 사이의 사회계약을 상상할 때보다, 신체를 조정하고 인도하고 훈육하고 기호를 부여하는 실천들과 장치들을 떠올릴 때 푸코가 말하는 권력 개념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체성의 생산. 이것은 통치의 관점에서나 자기배려의 관점에서나 몹시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푸코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신체의 생산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 시대에 개인들은 어떠한 담론적 비담론적 실천들과 더불어 신체와의 관계를 형성했을까요? 자기 주체화의 과정에서 신체의 생산이란 무엇일까요? 이런 관점에서 고대의 양생술과 의학과 쾌락의 관리법에 대한 푸코의 분석을 바라보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푸코는 아프로디지아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체의 생산에 접근하는데요, 그에 따르면 과거에 성행위는 무의식적 격렬함과 막대한 소모라는 측면에서 위험한 것으로 인지되었으나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이르면 차라리 인간의 몸과 그 기능 작용에 전반적 허약함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가령 갈레누스는 죽음·불멸·생식 간의 관계. 영원성의 결여라는 주제 속에서 ‘육체’와 ‘성’에 접근합니다. 불멸하는 것을 생산하고자 했던 조물주에게는 필멸하는 재료들밖에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마치 도시국가의 창건자가 처한 것과 같은 곤경 앞에 놓이게 됩니다. 어떻게 후대에도 자신의 법과 제도와 국가가 존속하도록 할 것인가? 최초의 사람들이 죽고 나서도 국가가 존속하도록 하기 위해서 창건자는 교묘한 수를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조물주는 자신의 작품의 논리적 결과를 잘 이끌어내기 위하여 생물을 만들고 그들에게 번식의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의 술책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술책은 다음의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정에 사용되는 기관들, 예외적이고 강력한 쾌락의 능력, 그 기관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마음 속의 욕망. 갈레누스에 따르면 조물주는 불멸하는 것의 생산을 위해 흥분의 메커니즘을 발명하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푸코는 갈레누스의 텍스트를 분석하며 거기에서 “생식의 우주학으로부터 경련성 사정의 병리학에 이르는 아주 뚜렷한 흐름”(133쪽)이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아프로디지아를 통해 인간은 불멸성에 참여합니다. 그만큼이나 아프로디지아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근거는 우주의 탄생에 기입되어 있죠. 다음으로 아프로디지아는 그 과정의 정확한 해부학적 자리잡기와 동시에 그것이 프네우마의 전체 구조 속에서 이끌어내는 결과들에 의해서 신체와의 복잡하고 부단한 상관관계의 작용 속에 위치합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로디지아는 질병 전체와 유사관계에 있는 거대한 영역 속에 자리잡고 그 내부에서 유사관계와 인과관계를 유지합니다. ‘육체’와 ‘아프로디지아’에 대한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의학적 이해는 이처럼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해를 수반합니다.

화요일 ‘예스-에이징’ 세미나에서 《동의보감》을 읽다가, 동양의학은 우리의 신체를 더 많은 것들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보도록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건강의 문제는 양적으로 표현되는 어떤 지수나 지표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신체는 이미 사계절의 리듬을 따르는 시간적 존재양태를 지니며, 따라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 몸에 대한 강박적 관리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가 놓인 우주적 조건을 이해하고 그 리듬과 합치되는 것을 뜻합니다. 서양의 고대 의학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에게 신체는 양적이기보다는 시간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출산에 유용한 시간, 주체의 연령, 계절 또는 하루 중의 적절한 시간 같은 것이 쾌락의 활용에서 중요한 준거점이 됩니다. 이런 앎들과의 관계 속에서 신체성의 생산은 규범이나 정상성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기 통치와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다음 시간에는 《성의 역사》 3권의 5장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이번엔 공통 과제가 있습니다. 한 페이지로 텍스트 내용을 정리하고 질문을 뽑아오시면 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