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2학기 열 두 번째 시간(7.16)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13 11:56
조회
133
푸코의 문제의식은 정말이지 깊고도 넓은 것 같습니다. 어렵지만, 우리는 《성의 역사》 시리즈를 계속하여 변주되면서도 일관되게 이어져온 푸코의 문제의식 속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2, 3권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푸코의 서술을 그냥 따라가기만 해서는 안 되고 푸코가 왜 이것을 보고 있는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죠. 푸코의 설명을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해서는 《성의 역사》 2, 3권을 ‘고대 그리스 · 헬레니즘 · 로마 시대의 성도덕에 관하여’ 정도의 제목이 달릴 법한 역사책으로 읽게 되어버릴 테니까요.

이런 우려 속에서 채운샘은 《성의 역사》 1권의 문제의식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이 책에서 중요했던 것은 ‘성’과 ‘성생활’의 계보학보다도 권력에 대한 테제였습니다. ‘권력은 생산한다’ 푸코에게 권력에 대한 사유가 중요했던 이유는 억압하는 권력 VS 욕망하는 개체의 구도를 넘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을 보았던 것은 성을 욕망으로 환원하는 프로이트적 전제에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였죠. 근대인들에게 성이란 개인의 내밀한 무의식, 사적인 욕망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욕망이 ‘개인적인 것’으로 실체화되는 순간, 우리는 사회를 말하기 위해서 억압을 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능’을 억압하고 금지하고 승화시키려하는 일종의 법질서로서의 권력.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모세혈관과도 같은 복잡한 권력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형성 과정을 뛰어넘어버리게 된다는 점과 자유의 문제를 ‘억압에 대한 저항’이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일시하게 된다는 점이 있습니다.

욕망과 권력,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각각 실체화하고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한 자유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사유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일찍이 스피노자와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죠.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라도 하듯 예속을 위해 싸운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구절. 그리고 노예는 주인 때문에 노예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반응적 힘의 사용에 의해 노예인 것이라는 니체의 통찰. 푸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 속에서 이와 비슷한 역설에 도달합니다. 글로벌화된 시장질서와 더불어 우리의 삶은 타율적 조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일리치가 지적하듯,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필요하게 되었죠. 우리의 평범한 하루에는 전 지구적 물류의 흐름들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인프라의 관리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노동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양식이 만들어내는 외부효과(대표적으로 기후변화)를 관리하기 위해 추가적인 다른 자본과 노동이 요청되고 있죠.

이런 조건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윤리는 ‘자유’와 ‘자기 능동성’을 외칩니다. 그리고 주체는 그가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 분할불가능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관리·개발하는 주체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공생의 가능성이 제거된 윤리,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자유, ‘더 나은 것’을 향해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개발하도록 하는 자기관리. 이것은 우리가 ‘주체’, ‘욕망’, ‘이해관계’를 실체화한 상태에서 자유의 문제를 도출하고자 할 때 이르게 될 수 있는 역설의 생생한 사례일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푸코는 통치성 개념으로 나아갑니다. 통치성은 작용하는 힘과 작용받는 힘을 동시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들뢰즈가 니체의 힘 개념을 해석하며 “복종하는 열등한 힘들은 명령하는 힘들과 구분되지만 계속해서 힘으로 존재한다. 복종하는 것은 힘 그 자체의 성질이고, 명령하는 것만큼이나 권력에 관계한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88쪽)라고 말했던 것을 푸코는 통치성과 사목권력 분석으로부터 이끌어냅니다. 우리는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자발적으로’ 복종합니다. 통치가 노골적인 폭력을 사용하거나 실제로 누군가를 탄압할 때조차도 그것은 통치의 한 단면일 뿐, 결국 통치는 타인의 행위를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기 위한 실천들의 총체이며 그러한 한에서 언제나 욕망과 본질적이고 상호결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통치는 욕망과 더불어서만 작동 가능하며, 《성의 역사》 2권 서론에서 푸코가 말하듯 복종하는 방식 또한 언제나 미결정적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목자의 뒤꽁무니만 바라보는 양도 있을 것이고, 남들이 다 가니까 따라가는 양도 있을 테고, 뭔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혼자 해쳐나가기는 너무 피곤해서 고분고분 따르는 양도 있을 것입니다. 자유와 예속은 모두 이러한 힘 관계 내에서 사유되어야 하지, 그것들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푸코는 이러한 고민 속에서 역사를 연구합니다. 그러니까 고대는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푸코가 참조하고 있는 하나의 샘플일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사회의 억압’이라는 구도를 다시 그리고, 자신의 윤리와 주체성을 능동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푸코는 역사를 사유의 재료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푸코는 고대인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쾌락 및 진실과, 자신을 둘러싼 타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사유한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겠죠. 물론 푸코가 고대 연구를 통해 어떤 결론을 내렸으며 어떠한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는지 우리는 명백히 알 길이 없습니다. 채운샘은 푸코가 좀더 살았더라면 다시 현대로 돌아왔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푸코는 고대로부터 자신이 발굴한 사유의 연장들을 가지고 현대로 돌아오는 일을 우리에게 맡긴 모양입니다.

저는 처음에 푸코가 ‘권력’, ‘지식’, ‘주체’에 대한 근대적인 오류들을 바로잡고 지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 채운샘의 강의를 듣다가, 정말로 푸코는 얼마나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수행하듯 실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문제에서 권력의 문제로, 또 권력 개념에서 통치성 개념으로, 그리고 뜬금없이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고대 그리스로 옮겨가야 했던 게 아닐까요? 푸코는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를 따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인식과 실천이 이전과 다르게 작동하도록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시간은 2학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성의 역사》 3권을 끝까지 읽어오시고, 발제를 맡으신 분들은 2권과 비교하면서 4, 5, 6장 중 맡으신 부분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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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3 14:10
    건화쌤 후기 잘 읽었습니다. 푸코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정리해주시다니~~감사합니다. 저는 채운쌤의 강의를 들으며 한자씩 필사했어요.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다루며 왜 푸코가 성을 가지고 왔는지 ᆢ숙고할수록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