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네 번째 시간(10.22) 공지 : 어떻게 복종할 것인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20 20:50
조회
147
지난 시간에는 《육체의 고백》 1장 4번 ‘최고의 기술’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영성지도,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주체의 주의 깊은 통제,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일, 지도자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일,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행동규범을 받아들이는 일”(165쪽) 이것은 고대의 철학적 삶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합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황금시편》에는 “네가 하루에 한 모든 행동을 반성하기 전에는 너의 눈앞에 부드러운 졸음이 슬며시 들어오는 일이 없게 하라”라는 구절이 있어서 전해져 옵니다. 또 푸코가 즐겨 인용하는 세레누스가 세네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타나듯 스토아주의 전통에서도 영성지도와 양심성찰은 빈번히 이루어지는 철학적 실천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고대의 철학적 전통에서 타자에 대한 복종과 주체 자신에 대한 성찰은 주체의 존재 역량과 행위 역량의 증대와 연관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그리스인들은 가족의 죽음이나 추방, 역경, 위기, 전환기의 어려움 등의 특별한 상황에 처했을 때 품행지도 교사나 의사, 체육교사, 철학자를 찾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언제나 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과정으로서만 수용되었습니다. “양심성찰의 목표는 자기통제”(170쪽)입니다. “지도 받는 사람이 자기를 성찰하고, 자신의 약점을 점검하는 것은 나중에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이고, 또한 힘든 시기에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독립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171쪽)입니다. 분명 철학 학원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도 힘관계가 작동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러한 관계에는 언제나 그 관계 자체가 변형될 여지가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스승과 제자 모두 그것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제자로 남아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정확하지는 않습니다)처럼, 이때 제자의 복종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것에 복종하지 않기 위함이고, 스승의 가르침은 언젠가 제자로 하여금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 없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4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철학적 기술들이 기독교 사상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기독교식 철학학교인 수도원에서 특히 영성지도와 양심성찰은 널리 수행되었는데, 여기에는 고대적 실천과의 중요한 단절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기독교 수도원에서 ‘복종을 위한 복종’이 형식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고대에 복종은 주체 자신의 자율성과 자기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수도원에서 타인의 지도에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보편적 원칙이 됩니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건 타인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 지도자가 원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고 모든 일을 감내하는 것. 이것이 수도사의 미덕이자 그가 행하는 수행의 핵심이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타율성은 본질적이며, 인간의 영혼과 악령은 기원이 같고 닮은꼴이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자신의 행동기준을 결정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의지의 포기, 하느님에 대한 의존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저는 ‘복종을 위한 복종’이라는 이 역설이, 스스로의 역량의 저하를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이, 복종과 슬픔이 선으로 둔갑하는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 생각보다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복종’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혹은 복종한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 세계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고 자기가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았으며 통제할 수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합당한 ‘보상’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는 것은 공공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다른 개인에게 복종하거나 타자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이나 공공질서, 합리성 같은 것들에 복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복종이 우리 자신의 역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요? 우리가 마스크를 열심히 쓰거나 질병관리본부의 지침을 열심히 따른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관점이 확장되는 것도,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기예가 형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고 관리되는 평균적 존재로서 스스로의 복종을 재생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양한 존재들과, 이러저러한 힘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무엇에도 복종하지 않는 삶, 그런 상태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자신의 복종은 ‘어떤’ 복종인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복종하는 가운데에서도 익명적 관리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을지. 어떻게 나의 복종이 나의 역량을 증대시켜주는 방식의 관계들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 이런 고민들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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