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세미나 4학기 세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박경혜
작성일
2021-10-20 23:11
조회
156

이번 주 세미나에서 나는 거의 빌런에 가까웠다.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동학들이 기독교를 보는 시각이 어떤지 궁금했다. 고대 철학과 기독교의 단순 비교를 넘어 기독교와 기독교의 단절이 동학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맴돌았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생각만 복잡한 채로, 정리가 제대로 되지도 않은 어설픈 질문들로 동학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후기라니...... 그럼에도 정리를 해 보자면, 



 가장 논의를 많이 한 내용은 복종이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고대 철학에서 행해졌던 '지도'를 기독교 안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자기 배려 차원이 아닌 자기포기를 향한 것이 되었다. 기독교에는 신이라는 절대 진리가 외부에 상정되었던 까닭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자이자 선이고 진리인 신에게 자기를 맞추는 방법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는 훈련이 필요했다. 이런 지도는 4세기 수도원에서 한 번 더 강력한 규율로 자리를 잡는다. 이것이 절대 복종이었다. 진짜로 자기를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복종을 위한 복종.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한 첫 걸음부터 시작되는 복종 훈련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양심을 성찰하는 데 필수적 과정이었다. 이는 자기 존재를 위해 스승에게 구체적인 문제 상황에 대하여 조언을 듣고 자기 독립을 확보하는 어느 시점에서는 그만둘수 있는 방법적이고 제한적인 철학의 조언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초기 교부들이 행하던 하느님을 닮으려는 열망을 발견하기 위한 훈련인 자기에 대한 인식과도 달랐다.  



 내가 겪어온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고대 서양철학과 초기 기독교와의 연관성은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지점이다. 오히려 얼토당토않게 왜곡해마지 않기도 한다. 이런 태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자기 인식이 항구적인 고백의 형식인 고해가 되는 과정이 궁금했다. 고대 철학과 초기 기독교에서 보이는 연관성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와 4세기 이후 기독교이 영향력이 커지고 수도원이 들어서면서 변곡이 일어나는 과정도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이 오랜 답답함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희망. 철학의 자기 배려를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자기 포기를 벗어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인지로부터 시작하게 된 고민을 풀어보고 싶은데 많이 막막하다. 동학들에게 빌런이 되지 않고 그들의 관점을 잘 듣고 나의 방향을 잡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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