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아홉 번째 시간(11.26)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1-22 14:42
조회
169
지난주에 이어 우리는 결혼생활에 관한 기독교적 윤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푸코는 이번에 우리가 읽은 3부 2장에서 크리소스토무스에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텍스트를 분석하는데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정과 결혼생활을 대립적으로 위치시키는 대신에, 둘은 ‘교회의 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에 협력한다고 말합니다. 동정생활이 우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생활도 ‘낮은 가치’일지언정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원 중심의 엄격한 금욕생활만을 긍정하고, 모든 성관계는 타락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선배들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 윤리의 ‘대중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흥미로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친절한 논리가 결국은 ‘교회’로 귀결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동정과 자기포기를 설파한 그의 선배들은 적어도 신앙인들에게 어떤 존재의 변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존재의 변환을 요청하지 않는 신앙과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결국 그것은 특정한 규범에 복종하는 것, 그리고 사제의 명령을 따르고 교회라는 제도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요?

조금 뜬금없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보편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면 고대의 철학학원은 결코 ‘보편적인’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아이건, 에피쿠로스의 정원이건, 에픽테토스를 비롯한 스토아주의자들의 학원이건 간에 그들은 모든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삶의 방식 같은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죠. 스스로를 돌보기를,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 그렇게 하기 위해 어려운 수련을 겪어내기를 결단한 자들을 위한 공간이 고대의 철학학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러한 공간들은 ‘모두를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제도였던 것이죠.

누구든(에피쿠로스 학파의 경우에는 노예와 여성도) 찾아가서 철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모두를 위한,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통치하기 때문에 누구의 통치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는 독특한 존재들을 길러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공간. 이러한 철학학원들과 달리 교회는 ‘모든 이들’을 포섭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편을 자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제도에 속하는 것 자체, 규범과 가치를 따르는 것 자체와 구원을 동일시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여자에게 그 역할을 맡긴 협력의 성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441쪽)

이번 챕터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위의 구절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묻습니다. ‘여자는 무슨 쓸모인가?’ 성관계, 육욕이 죄악이라면 하느님은 어째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것일까? 왜 아담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왜 이브까지 필요했던 것일까? 이런 질문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질문방식에는 어딘지 끔찍한 데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의 정당성을 그 외부로부터, 거기에 부여된 의미나 목적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접근방식. 이상하게도,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인간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과거로부터 남성과 여성은 협력하며 살아왔다는 것, 모든 인간은 여성의 자궁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창조주 신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의미화하는 것. 이 세계를 계획을 가지고 설계한 신을 상상하는 것. 이것은 인간 자신을 위해 완벽하게 셋팅되어 있는 세계를 꿈꾸는 방식이자, 그러한 이상에 비추어 현실과 현실에 속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상주의는 물론 파시즘이 깃드는 장소겠고요.

다음 주에는 <육체의 고백> 3장 3번 '성욕과 리비도'를 읽고 과제를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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