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4학기 여덟 번째 시간(11.19)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1-16 20:18
조회
147
이번 주에는 《육체의 고백》 3부에 돌입했습니다. 2부까지 우리는 수도원의 형성과 더불어 구축된 수도사들의 신앙실천에 관한 푸코의 분석을 접했습니다. 내면의 성찰과 고백, 동정의 추구와 금욕. 이러한 구체적 기술들이 어떻게 무한한 자기 객체화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에 이르는, 역설적 주체성을 탄생시켰는지를 보았죠. 이제 기독교는 속세로 시선을 돌립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국교로서 공식화된 기독교는 사회의 조직, 관리, 통제, 법규 제정 같은 많은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개인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제국의 관료주의와 교차하며 교회는 이제 개인을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모든 신도들에게 동정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마냥 방치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결혼생활은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의미화됩니다. 푸코는 크리소스토무스의 텍스트를 참조하는데요, 그는 결혼생활에 관한 그리스-로마, 그리고 클레멘스의 모럴들을 차용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치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크리소스토무스에게서 결혼은 생식의 문제와 단절된다는 점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더 이상 생식이 아닙니다. 결혼생활에서의 성관계는 전통적으로 후손을 낳는 문제와 연관되었으나, 놀랍게도 크리소스토무스는 이것을 “자녀의 문제가 아니라, 금욕의 문제”(396쪽)와 연관시킵니다. 크리소스토무스에 따르면 속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혼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혼생활에서의 성생활 또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는 오직 육욕을 제어하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만 정당화됩니다. 결혼은 육체의 욕망에 제한을 가하는 방법이며, 타락으로 인해 무절제의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제시된 정지선과도 같습니다. 결혼한 부부는 서로의 육체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행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욕망의 무절제함을 제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행위가 기이한 방식으로 의미화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제 결혼은 서로의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나눠 갖는 것을 뜻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한쪽이 다른 쪽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게 됩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합법적인 결합을 못 하게 함으로써 남편을 방탕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자 이제 부부 간의, 육욕의 관리를 위한 합법적이고도 성스러운 성적 결합과 법률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비천하고 타락한 성적 결합이 각각 출현하게 됩니다. 이것을 고대인들의 자기배려와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로운데, 우선 그들에게는 더럽거나 성스러운 행위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행위의 주인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결혼관계 내에서도 남편과 아내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했지, 서로의 신체와 욕구에 대한 독점권의 행사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섹스에 대해 혐오와 환상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행위 자체를 동물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무언가 신비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어떤 관계에서 행해질 경우에는 매우 더럽고 역겨운 것으로 여기는가 하면 다른 경우에는 낭만적이고 때로는 심지어 성스러운 것으로까지 여기기도 합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하듯, 실상 살과 살의 마찰이고 쾌락을 동반한 짧은 경련일 뿐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렇게 행위 자체에 대해 환상이나 거부감을 갖는 방식은, 그러한 행위가 구성되는 조건이나 우리 자신이 그러한 행위를 구성하는 방식, 그 행위에 수반되는 욕망과 관계하는 방식에 대해서 질문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육체의 고백》 3부의 2장 '결혼의 좋은 점과 이로운 점'을 읽고 과제를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미영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그 다음시간 간식은 소현샘, 12월 첫째 주 간식은 경혜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제가 기억하려고 적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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