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 3/ 마지막 시간 공지/ 세 종류의 즐거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10-25 15:30
조회
168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진실을 그대로 아는 것과 비교해서 그리고 배우는 동안 언제나 누리게 되는 그런 즐거운 상태와 비교해서 다른 즐거움들을 어떤 걸로 간주할 것이라 우리는 생각하는가? 아주 못 미치는 걸로 간주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들을 정말 불가피한 즐거움들이라 일컫지 않겠는가? 만약에 불가피하지 않았던들, 다른 즐거움이 그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을 테니 말일세.”(플라톤, 《국가》, 서광사, 582쪽)


드디어 《국가》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국가》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올바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올바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올바름 그 자체는 좋은 것인가? 올바르게 사는 자는 행복한가?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의 원인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책의 초반부에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읽은 8권에 이르러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비교하며 최선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국가에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에 대한 설명을 다시 개인에게로 가져와서 올바름을 정당화합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혼 안에는 각각 상이한 기능을 지닌 세 가지 부분이 존재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것을 통해 배우는 부분과 그것으로써 격하게 되는 부분, 욕구하는 부분입니다. 한 인간의 혼 안에서 이 세 가지 중 무엇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 ‘이기기를 좋아하는 부류’, ‘이(利)를 탐하는 부류’로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진실을 그대로 알고 배우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은 나머지 두 부류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관망하는 즐거움이 명예를 누리고 재물을 소유하는 즐거움보다 크다! 이 말이 흥미롭게 여겨진 것은, 플라톤이 끊임없이 욕구의 절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올바른 삶과 쾌락을 대립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올바른 삶을 사는 자, 이성적이고 절제력이 있는 자는 자신의 즐거움을 단념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인식하고 배우는 것이 다른 세속적인 즐거움을 압도한다는 걸까요? 저는 그 차이가 인식을 통한 즐거움의 경우 그 즐거움이 자기 존재의 변형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러저러한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는 경우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할 수 있겠으나 우리 자신의 관점을 확장시키거나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아무리 자극이 커도 우리 안에는 늘 얼마간의 공허감이 남을 것입니다. 인식하고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커진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소비나 소유, 그리고 타인의 인정 같은 것을 통해 얻게 되는 쾌락은 덧없고, 늘 더욱 새롭고 강렬한 자극을 찾도록 우리를 몰아댑니다. 반면 배움을 통해 느끼는 기쁨은 어렵지만 단단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식이나 몇몇 감각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와 관련된 기쁨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러한 즐거움을 삶의 중심에 놓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생각한 올바른 삶인 것 같습니다.

다음 주는 이번 시즌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플라톤의 주요 저작들을 읽으며 배운 내용 중 가장 크게 남은 것을 중심으로 짧은 에세이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2페이지 이상). 그럼 목요일에 뵈어요!
전체 1

  • 2021-10-26 11:26
    즐거움의 단념이 아니라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 올바름이자 이성적이고 절제력 있음이란 말 좋네요. 메모메모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