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숙제방

장자 시즌2 8주차 메모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8-13 08:10
조회
107
붕괴와 이민

“이런 방식으로 사라진 국가들은 마치 불빛처럼 꺼져버렸지만, 그 인구의 대부분은 탈출과 분산에 의해 살아남았을 것이다. 토사 유입, 수확 감소, 염류화로 소멸한 국가들은 역사 기록에서 꾸준하거나 불규칙적으로 점점 사그라진 것처럼 보인다. 인구 유출이 일어나거나, 흉년이 더 잦아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극적인 반환점이 반드시 나타나지는 않고, 오히려 거의 감지할 수 없이 국가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 적용하기에 ‘붕괴’란 용어는 너무 부자연스럽다. 그러한 과정은 그와 관련된 국가의 국민에게는 너무나 흔한 일이어서 정착지와 생계 방식의 분산과 재배치라는 익숙한 일상일 뿐이다. 오직 국가 지배층에게만 ‘붕괴’라는 비극으로 경험되었을 것이다.”(258)

초기 국가는 취약하다. 여러 생물이 한데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국가적 운동의 필연적 귀결이다. 그것은 ‘살기 좋은 나라’라는 소문으로 주변의 수렵·채집민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변 혹은 또 다른 나라를 포섭·정복함으로써 중심을 확장시킨 결과다. 그러나 유례없는 군집생활은 말라리아 같은 ‘문명의 질병’을 발생시킨다. 질병은 국가가 중심을 확장시키는 바로 그 경로, 교역이나 군대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확산된다.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구성원들은 “본능적으로 가능한 한 빨리 시골로 달아나려 했을 것이고, 초기 국가에서는 그들의 도주를 막으려 강하게 압박했을 것이다.”(250)

이러한 상반된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는 틈 없는 울타리로 중심을 고집하는 반면, 구성원들에게는 취약한 국가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헬조선’ 탈출 같은 이민에 대한 열망은 우리 DNA에 새겨져 있는 역사적 생존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열망은 피통치자의 입장에 자주 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이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지배층 혹은 거기에 자신과 동일시하는 피통치자들뿐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봐도 국가의 붕괴 자체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세대에게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주류적이었는지 국가의 붕괴가 대단히 큰 문제로 다가왔다(사회주의·자본주의 같은 이념적 실험으로 공동체를 운영해서 그런 걸까?). 어떻게 보면, 집단적 의식이 미약한 것이 더 보편적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이민자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가령, 한때 뜨거운 이슈였던 제주 예맨 난민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 중 대부분은 내전 중인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싶다고도 말했다. 문제는 그들을 대하는 자국민의 태도였다. 그들을 배척하려는 시선들(스마트폰, 종교 등등)에는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순혈주의 같은 것이 느껴진다. 특정한 공동체에 자리 잡아야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제 시대는 여러 요인에 의해 언제든 다양한 공동체를 전전할 수 있는 삶을 요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민·난민의 문제가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다뤄져야 하지 않을까?

 

장자 에세이 개요

주제 : 무위지치(無爲之治)

문제의식 : 장자의 반(反)정치에 전제된 정치적 태도란 어떤 것일까? 중심을 해체하는 정치성은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 주체 혹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 장자의 정치성은 어디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모든 제도적 정치를 반대하는 장자. 그런데 어떤 중심도 생겨나지 않는다면, 사실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지 않나? 중심이 없는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진 각자도생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 《농경의 배신》. 국가적 중심의 형성이 꼭 우리에게 이로움으로 작용하지도 않고, 국가적 중심의 해체가 꼭 우리에게 무질서함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야만인의 삶, 주변인의 삶으로 돌아갈 때 삶이 더 안정되고, 풍부해지는 역설. => 무엇이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만드는가?

  • 코로나가 보여준 국가적 중심의 취약성. 모든 것을 통합하는 흐름에서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의 발생은 필연적. 발생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국가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다만 과거에는 질병이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면, 지금은 질병에 노출되는 것은 주변부의 존재들. 즉, 우리들. 국가가 싸지른 똥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 재난은 계급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이른바 재난의 불평등. 제도적으로 처리되지 않는 태생적 한계.

  • 장자적으로 접근해보자. 중심을 세운다면, 그것이 어떤 점에서 우리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에게 이로운 중심이란 것이 무엇일까? 유가적 인의(仁義), 법가적 상벌제도, 묵가적 겸애(兼愛)… 장자가 봤을 때는 어떤 중심이 세워지든 별반 다르지 않다. 통치자의 의도는 피통치자들에게 고스란히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좋은 의도 속에 혼란스러운 면모만 더욱 부각되고, 조장된다. => 성인이 사라지지 않으면, 천하의 도둑도 사라지지 않는다.

  • 지금의 정치의 한계. 어떤 통치자를 세우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요구되는 것은 정치를 구성하는 토대의 역량. 민주주의에서 강조되는 것도 공동체 구성원들이 중심을 형성하고 해체하는 정치적 역량이지 뛰어난 대표자의 역량이 아니다.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겠다. 중심의 형성은 그것을 해체하는 것과 동일한 역량이 요구되고, 그런 의미에서 장자적 정치 이상은 각자도생이라기보다 모든 중심적 정치 질서에 포획되지 않을 수 있는 역량의 고양이라 할 수 있을 듯.

  • 국가적 중심으로 포획되지 않는 주변부는 항상 있었다. 과거에는 그것이 국가 주변의 야만인들이었고, 추장의 말을 듣지 않는 부족민들이었다. 지금은 형태가 좀 다르다. 국가 안에서도 그런 주변부들이 있는데, 문제는 이 주변부가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다.
    이민자를 비참한 상태가 아니라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로 볼 수는 없을까? 국가의 붕괴를 선언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이민자는 가능할까? => 이민자의 사회 혹은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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