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숙제방

에세이 최종

작성자
소정
작성일
2021-08-17 21:04
조회
112
장자/2기/에세이/2021.08.20/소정

경청-모두를 듣기
  1. 경청을 시작하다


나는 지난번 장자 세미나에서 규창 쌤이 호진 쌤의 에세이 아우트라인을 듣고 코멘트를 하는 도중에 문득 순옥 쌤에게 필요한 텍스트가 생각나서 “순옥 쌤 세미나 ○○ 책을 보세요.”라고 말했다. 맥락을 끊는 나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규창 쌤은 “지금 호진 쌤의 에세이 얘기를 하는 중인데요.”라고 하며 당황하였다. 하지만 나는 “호진 쌤은 프로니까 프로페셔널하게 그냥 쓰세요.”라고 말하며 토론을 중간에서 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나는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역사 초기에서 인류의 행동 또한 다른 생물들과 인간개체에 대한 고려 없이 즉, 생태계를 경청하지 않는 방식으로 농경 사회를 만들어나간 경향이 크다는 것을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고인의 말에 이르기를 “옛날 천하를 다스렸던 군주는 스스로 무욕(無欲)하여 천하 인민의 삶이 충족되었으며, 스스로 무위(無爲)하여 만물이 저절로 화욕(化育)되었으며 스스로 깊은 못처럼 고요히 침묵하여 천하 만민의 삶이 안정되었다.”라고 하였다. 전해 오는 기록에도 이르기를 “근원의 一인 도(道)에 통달하면 만사가 모두 잘 되었으며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면 귀신(鬼神)들까지도 감복(感服)한다.”고 하였다. 《장자》 (천지) 1장. 18쪽

 

장자의 무욕이란 내 생각만이 중요하다고해서 그것을 앞세우려는 욕망이 옳지 않음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길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함이 道를 통달함과 연결되어 무욕함으로써 나와 타자를 욕망의 도구화하지 않는 무심의 경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1. 경청으로 무욕하기


『농경의 배신』에서 ‘농업사회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전염병에 더욱 취약해지게 된 것은 대부분 야생에서 얻을 수 있는 음식과 고기가 빠지고 상대적으로 탄수화물 함량이 높아진 단순한 식단에 의존한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이 농업사회로 들어오면서 개체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경청하지 않고 유전자를 널리 확산시키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썼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인간은 수렵채집시대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고 자신들을 농경이라는 틀에 종속시키면서, 기르는 작물 역시 ‘일정한 경작지와 과밀화된 환경 조건에 기초한 일종의 ‘정착생활’뿐 아니라 인간이 주도하는 새로운 선택압[도태압]에 종속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인간이 기르는 작물들도 길들여지기 전보다 더 열악한 생존능력을 갖게 되어 ‘농경사회는 수렵·유목사회보다 인간과 그에 길들여진 생물의 자유를 억압하고 삶의 상태를 나쁘게 하는 여러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다.’

앞선 세대를 더듬어보면 우리들은 농경사회에서 그렇게 많이 떨어져있지 않다. 불과 5~6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농경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근대의 인류는 아직 농경사회에서 발아된 국가단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에 자본의 욕망이 덧씌워져 전근대적 세계보다도 생태계와 유리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인류의 욕망은 생태계의 상태를 나쁘게 하는 경향성을 가져와서 지구는 온난화라는 기후재앙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에 더하여 인류는 코로나 같은 전 지구적인 전염병에 몸살을 앓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농경의 배신』 6장에서는 ‘결국, 중심에서의 ‘붕괴’란 문화의 소멸이 아니라 문화의 재공식화와 탈중심화를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라고 말하여 농경사회가 만든 국가의 종속적 삶을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7장에서는 ‘다시 야만인이 되는 관행은 …… 그건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체제 전복적이’이고 ‘…… 물리적 이동, 끊임없는 변화, 개방된 변경, 혼합된 생계 전략들이 이 시대 전체의 특징이었다.’라고 하여 농경사회에서의 탈주가 채집·수렵사회로 빈번하게 이루어졌음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문화의 재공식화와 탈중심화를 이루기 위한 채집·수렵으로 돌아갈 공간을 가지지 못한다. 지구는 길들여진 인간과 작물과 동물들로 이미 만원이다. 이제 근대는 어떻게 현재의 종속적 삶을 채집·수렵사회 없이 벗어날 수 있을까?

 
  1. 에서 경청하기


현대의 사회를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국가가 없으면 생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가에 길들여진 삶을 살아가면서 국가가 제시하는 목소리에 대부분 의문 없이 따른다. 하지만 국가의 비전은 생태계와 개체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국가단위의 핵을 쓰는 발전소는 계속되고 있고 인류가 먹을 식량은 넘쳐나지만 많은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이제 국가가 말하는 의견에서 어떤 것이 정말로 나를 또는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지를 경청해야한다.

자유롭게 해주는 경청은 국가를 더 키워나가려는 욕망의 목소리에서 떨어져 나와, 인공적인 빛이 아닌 내면의 어둠이라는 정적 속에서 본성으로 들어야한다. 본성은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생명과 함께 존재하라고. 왜냐하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나를 제외한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우리 할머니들은 구정물을 땅바닥에 버릴 때조차도 ‘물 버려요, 모두들 조심하시게’라고 땅에 있는 미물들에게 먼저 말하고. 한 템포 쉬는 순간 ‘할멈, 왜 이렇게 물을 자주 버리냐?’는 개미의 투덜거림부터 ‘물이 시원할 것 같다’는 지렁이의 즐거운 소리, 홍수가 날거라고 외치며 우왕좌왕하는 땅속 미생물의 소리까지 ‘無’에서 경청한 다음에 버렸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생명이 약동하는 채집·수렵의 공간으로 떠날 수 없는 우리는 할머니들의, 장자가 말하는 ‘정적 속에서 홀로 커다란 和音을 듣는 모습’으로 모두를 경청함을 체득하여야한다. 그래서 채집·수렵의 삶에서처럼 모두와 다 같이 살아나가는 공통체로서 삶을 만들어 가야한다.

 

“……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보며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귀 기울이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새벽빛을 보며 소리 없는 정적 속에서 홀로 커다란 和音을 듣는다. 그 때문에 깊이 하고 또 깊이해서 만물을 만물로 존재케 하고 신묘하고 또 신묘하게 해서 만물이 精妙하게 한다. 그 때문에 만물과 접촉할 때에 스스로 완전한 無이면서 만물의 각기 다른 요구에 이바지할 수 있으니 나그네가 때때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잠잘 곳을 찾는 것처럼 대소장단에 맞추어 마침내 영원한 곳에 이르기까지 만물이 쉴 곳을 찾아 준다.”《장자》 (천지) 3장.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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