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724 수업 공지입니다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7-19 16:09
조회
2547
날이 덥네요. 모두들 무사하신지? 부처님도 몸이 있으니 더위를 모르시지 않았겠지만, 덥다고 해야 할 걸 늦추거나 하셨을 턱이 없죠.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또 추운대로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모름지기 이것이 수행승의 자세! >.< 방일해지기 십상인 계절에 두 눈 크게 뜨고 에세이 준비를 해봅시다.

다음 주에는 디가니까야 끝까지 읽어오시고요, 공통과제 대신 에세이 개요를 준비해오심 됩니다. 개념 중심으로 작성하실지, 혹은 경전 중 한 편을 선택해 해석하실 건지 결정하신 뒤 그에 대한 개요(주제 제시 및 서론-본론-결론 구상)를 만들어오셔요.

이번 주 후기는 성희쌤과 복실쌤. 성희쌤 후기는 이미 올라와 있으니 다들 확인하시고요, 복실쌤도 늦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간식은 계숙쌤+윤지쌤.

지난 시간에는 3품의 전반부를 함께 읽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볼 수 있었는데요, 특히 수업 시간에 들은 '보시'와 '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지혜가 있지 않고는 보시와 자비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수업 때 몇 차례 들었었지요. 이번에 채운 쌤은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네요. 내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 나를 지금 이렇게 존재하게 하는 수많은 조건들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 이에 대한 투철한 앎이 없이는 자비심도 불가능하고, 보시도 불가능하다…….

보시라는 개념은 생각하면 할수록 묘하고 난해합니다. 준다는 마음 없이, 기대하는 마음 없이, 자타 구분도 없이 주는 게 보시라면, 실상은 주는 게 아니어야 보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준다는 게 성립되지 않는 보시,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지만, 생각해보면 채운쌤 말씀대로 모든 존재는 바로 그런 보시 때문에 태어나고 살아갑니다. 태양의 보시(열과 빛), 나무의 보시(산소), 어린 아기의 보시(보들보들한 살성>.<)…….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처럼 보시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하는 것도 가능한 거죠.
그런데 유념할 점이 있는 듯합니다. 내가 남들에게 받듯 나 또한 남들에게 나도 모르게 주는 게 있겠으나, 불교에서는 우리네 사람들이 저마다 이미 보시하고 있으므로 무위해도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그냥 지금처럼 살아라, 그래도 보시하는 거다, 이런 거 아니라는 말씀.
관건은 우리가 선물들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 빚진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고, 그런 뒤 주는 나와 받는 상대, 이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은 채, 어떤 희망이나 기대 없이 무언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하나하나의 행에 무겁게 잉여가 들러붙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뭔가 대단한 걸 해야 보시가 아닙니다. 목숨을 바치는 정도가 아니면 보시가 아니다, 이런 거 아닐 겁니다. 그저 지금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에 대한 감당도 (상대에게 전가하거나 내심 바라지 않고)내가 온전히 짊어지려는 마음, 그게 보시죠. 이는 정말이지 무상과 무아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요.

이와 연관해, 지난 수업에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운쌤 왈, 자기 자신만 보는 자, 자기 번뇌에만 몰두하는 자, 이런 자는 무자비하답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붓다가 들려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는 이것만이 진리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무상하고 존재는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중생은 붓다의 이와 같은 설법을 한참 들은 뒤 무얼 하느냐면, 자신에게 다시 눈을 돌려 어떤 새로운 바람 하나를 세운답니다. 부처님 말씀도 이렇게 들었으니, 이제 나는 이러저러하게 되겠지, 혹은 이러저러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채운쌤 말씀으로는 바로 그게 문제래요. 보아야 할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신이 이와 같이 조건화된 이 세계인데, 자신의 삶 전체인데, 오직 자신에만 골몰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큰 스승님의 법문을 들어도 안 들어도 매한가지인 거죠. 내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이게 내게 어떤 효과가 있을지를 따져보고, 이 선택의 결과가 이럴 거라 예상하고... 모든 일을 나를 중심으로 편성합니다.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중생의 고통은 이로부터 생겨납니다.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들이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번뇌를 겪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오직 나의 것이거나 아니면 그의 것입니다. 고통조차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게 중생인 셈!
그래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 혼자 고통 받는다! 나만 팔자가 이래! 쟤들은 내 고통을 몰라! 세상 모두가 나를 몰라! 누구누구 때문에 내가 지금 힘들어! 그런데 정작 그들은 내 고통을 몰라!
이러니 삶 전체가 고통으로 그득해집니다. 그가 몰라준다는 사실, 이를 견디지 못해 자신의 고통을 한층 더 무겁게 만드는 거지요.

아마도 채운 쌤께서는 이와 관련해 일으킬 수 있을 전도, 그게 자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 듯합니다.
몰라준다고 생각해 고통 받는 이는 사실 누구보다도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고 둔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지요. 아주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당사자가 겪어내야 할 것,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때로 아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타인이 이러저러한 번뇌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번뇌의 그물 안에 그와 공존하는 다른 존재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한 사람의 번뇌가 이 세상의 번뇌라는 것을 아는 이가.
단지 감정이입도 아니고, 제 감정을 전이한 것도 아니고, 상상이나 억측도 아닙니다. 그가 아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로부터 각각의 번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이 세계가 무상하고 그 무상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온다는 것이죠. 그걸 알기에 그는 자신의 탐착으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받지 않지만, 동시에 그래서 그는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깨닫지 못한 모든 이들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기 때문이죠.
자비란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인가봅니다. 무지와 탐착으로 인한 번뇌가 없는 이만이 세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마음. 한 사람의 번뇌도 세계 전체의 번뇌라고 여겨 슬퍼해주는 마음.

...보살의 자비심이나 보시에 대해서는 쓸 때마다 벽을 느끼곤 합니다.(딴 건 안 그러니. 묻지 말아주세요) 아직 모르는 채 언어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만 한가득. 아마도 에세이에서 이에 대해 쓰지 않을까 싶네요.

다른 분들도, 그간 디가니까야 읽으시며 풀리지 않는 부분, 뭔가 미심쩍거나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부분 있으실 거예요. 바로 그걸! 놓지 마시고 이번 에세이에서 최선을 다해 숙고하고 풀어보시길 바래요.

더운 여름은, 울 부처님과 함께~ ^0^ 다음 주에 만나요. 지각 안 돼요~~ 개요 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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