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숙제방

3학기 에세이 고침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9-15 21:23
조회
29
170912 절차탁마 M 에세이 / <거대한 전환> <두 도시 이야기> / 혜원

 

서비스, 사회, 공동체

 
  1. 제도와 임금에 기대어


 

예전부터 나는 시장경제가 이렇다 자본주의가 저렇다 하는 문제제기에 뚜렷하게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가 없었다. 시장경제체제 문제들 즉 임금문제, 노동환경문제, 노사문제에 대해 습관적으로 ‘고용주가 억울한 노동자를 착취했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사측이 뭘 잘못했다는 거지?’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이다. 가령 대규모 해고사태가 일어나서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이익집단인 기업이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불가항력이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갑자기 경제적인 기반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분명 이런 사태는 노동자들이 ‘노오력’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측의 부당한 해고도 아니었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착취’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관점을 보면서 ‘아, 이거구나,’ 하고, 계속해서 찝찝하게 갖고 있던 상식 하나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시장경제는 ‘착취’를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노동자들의 ‘만년 간난’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를 풀어낼 수는 없다. 폴라니는 문제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19세기 영국 사회는 이익이 “인간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조직된” (폴라니, <거대한 전환>, 415쪽) 일시적인 집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폴라니가 말한 사회적인 접근이란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사회적인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와 함께 가져온다. 인간을 경제적 이익이 추동하는 동물이라고 보면 생기는 문제점은, 말 그대로 경제적 이익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존재로 인간을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 외, 인간에게는 아무런 윤리적 가치도 사회적 가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지금 계속해서 직장을 가지려고 하는 것, 그리고 소비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문제일 것이다. 그 외 자신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폴라니는 사회적 맥락에서부터 ‘뿌리 뽑힌’ 이들을 봐야, 진짜 시장경제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구나, 인간의 사회적 맥락!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뿌리 뽑힌’ 감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내게 사회는 곧 외부에서 나에게 권리로서 주어지는 ‘사회 제도’다. 다시 말해 나에게 사회란 서비스의 문제로 환원된다. 서비스란 일정 조건이 갖춰지면 받을 수 있는 봉사다. 사회보장제도는 일정소득 미만이어야 하고, 일정 나이가 되어야 의무교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약정을 잘 읽어봐야 내가 원하는 서비스를 받고... ‘착취’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내게 계속 남은 문제는 사회를 ‘사회 제도 및 서비스’로만 보는 나 자신이었다. 폴라니는 사실 사회란 여러 가지가 있고 특정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사회 제도가 아닌 다른 사회의 구성을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나는 ‘임금’과 ‘사회 제도’가 나의 권리이고, 그 권리로서 내가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1. 불평등이 문제인가


 

우리는 일단 두 가지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첫 번째, 현실에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오로지 분파적 이익뿐이며 사회 전체의 전반적 이익이란 결코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와 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것으로, 인간 집단의 이익을 오로지 화폐 소득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생각이다. (...)

누구나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다양한 이익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기에, 교회, 지방 자치제, 각종 결사체의 분회, 동호인 모임, 노동조합, 그리고 가장 통상적인 것으로서 폭넓은 단결 원리에 기반 한 정당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지역적/기능적 결사체를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게 된다. 따라서 집단의 이익이라는 것은 너무나 협애하게 정의하고 이해하게 되면 사회 정치적 역사를 굴절이 심한 안경을 통해 비뚤게 보는 결과를 낳게 된다. (폴라니, <거대한 전환>, 417)

 

분명히 맞닥뜨리는 경제적 문제가 있다. 낮은 임금, 가난, 빈부격차, 갑/을 분쟁과 같은 것. 이 문제를 ‘억울하면 더 벌든가’ ‘노력해봐’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물론 할 말은 있다. 일명 ‘수저론’인데, 기초자본이 탄탄한 ‘금수저’와 그렇지 않은 나머지가 어떻게 동등한 경쟁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재분배 문제가 불거진다. 의무교육, 무상급식, 기초수급, 최저임금, 부자세 같은 제도로 그 불평등을 어느 정도 완화한다. 소득이 낮은 계층은 더 탄탄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소득이 많은 계층은 더 많은 세율의 세금을 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들이 생겨나고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한다. 결국 시장경제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반드시 사회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폴라니는 시장경제가 단순히 경제적 문제일 수 없다고, 시장경제의 팽창과 사회의 저항이라는 이중운동이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이전보다 좀 더 나은 물질적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시장경제 덕분이 아니라 사회의 저항 덕분이다. 국가적인/경제적인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국가의 여러 법률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국가를 스스로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사회의 차원이 있어 그것이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저항을 단순히 제도의 마련만 본다면 문제가 생긴다. 시장 경제는 사회의 저항을 통해 더 활발하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업자가 ‘노동자에게 결과에 상관없이 똑같은 임금을 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말에 일단 야유를 보낸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던가? 산업혁명이 일어나 인클로저 운동과 기계적 생산이 증가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일정 소득을 보장하는 ‘스피넘랜드 법’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냈는지 보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저질 인력’이 되고 스스로 빈자(貧者)를 자처하며 굳이 일하려 하지 않았고 고용주들은 그걸 빌미로 임금을 가장 낮은 수준으로 깎았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은 굶주리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라는, 사람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론도 나오게 되었다. 폴라니는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에 대응하는 방식은 결코 경제적인 각도에서 다가가선 안 된다고 말한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사회가 보장하는 경제적 평등도 아니다. ‘무능하기 때문에 임금을 덜 주겠다’ 와 ‘동일한 조건만 마련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말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 바로 인간은 이익을 동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익을 위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일을 할 것이기 때문에, 노력에 합당한 대가만, 모두에게 똑같은 조건만 있으면 될 것이라는 믿음.

평등한 조건은 곧 평등한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은 곧 불평등에 대한 극심한 증오, 자신의 ‘손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모두 평등한 기반을 가정한다면, 뭐라도 하나 안 챙겨먹으면 자신에게 결락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곧 남들보다 ‘이익’을 덜 보는, ‘손해’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시장경제체제는 불평등을 선호하지도, 착취를 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평등을 선호하며 그로써 구성원으로 하여금 늘 ‘손해’를 의식하게 만들어 더 악착같이 ‘이익’을 향하도록 만든다. ‘모르면 손해!’라는 말, ‘지금 사지 않으면 손해!’ 등등 모두 내가 모두와 같은 기반 위에 있는데 그걸 취하지 못해서 뒤떨어지게 된다는 위협이다. 내가 시장경제체제에서 ‘그래도 벌어야지’ 라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 ‘이익’이 아니라 ‘손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와 동시에 시장경제체제는 계속해서 ‘나’를 챙기라고 말한다. ‘손해 보는 것도 이익을 얻는 것도 모두 나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기준은 화폐의 많고 적음뿐이다. ‘나’는 이것에 따라 줄어들고 커진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1. 경제적 계급과 사회적 신분 사이


 

경제적 이익만이 척도인 것을 자유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두 도시 이야기>의 찰스는 런던에서의 삶을 일종의 자유로 받아들인다. 그는 “일을 하면서” 저주받은 귀족이라는 신분과 무관하게 살겠다고 자신의 삼촌에게 선언한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80쪽) 런던은 그에게 “혼란과 압제와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였다. (같은 책, 192쪽) 누구나 자신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도시, 런던. 한편 마네트 박사에게도 런던은 도피처였다. 그는 억울한 죄수 신분에서 벗어나 런던으로 겨우 당도해 의사이자 루시의 아버지로서 ‘되살아난’ 참이었다. 문제는 이 둘이 파리에서라면 서로 원수지간이었다는 것이다. 마네트 박사는 귀족집안에 의해 죄수 신분이 되었었고, 그 귀족집안의 후계자가 바로 다네이였던 것. 이들이 프랑스에서의 모든 맥락을 끊어내고 런던에서 만났을 때 서로는 과거의 맥락마저 모두 묻어버리고 의사와 교사, 장인과 사위로만 관계 맺어야 했다.

폴라니는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찰스 다네이는 일종의 ‘뿌리 뽑힌’ 존재라고 말이다. 즉 다네이는 런던에 왔다고 해서 ‘귀족’에서 ‘교사’가 된 것은 아니다. ‘귀족’은 신분이고 ‘교사’는 직업. 엄연히 범주가 다른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한 어디에 있든 귀족이었다. 혁명 다음에도 그건 마찬가지여서 무슨 사연이 있건 상관없이 그 신분 자체만으로 투옥사유요 사형감이었다. “우리의 철학의 철학은 탄압뿐”이라던 삼촌과 대립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그의 고유한 사회적 위치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런던에서 그는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니었다. 개인이었다. 다네이는 런던에 도착해 개인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때 런던 사회는 다네이에게 어딜 가든 귀족이라는 고유한 딱지를 붙여주는 곳과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직업의 세계는 일한 만큼 버는 세계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던 영국에서 구빈법이 야기시킨 행정문제는 실업자 수와 지방세 납부액이 함께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버크와 벤담은 이것을 해결할 열쇠로 자유방임을 외친다. ‘그들의 빈곤은 그들이 알아서! 경제적 문제는 경제적 영역 자체에서 해결하도록!’ 이때 나온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산하는 통계였다. 그래야 임금수준을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전체적인 사회 이익의 문제로 볼 때 개인은 언제고 대체 가능한 인력이었고, 시장경제체제 안에서 ‘모두가 한 사람 몫만큼’ 있는 개인들은 직업을 갖지 않으면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밝힐 수 없었다. “노동을 인간의 다른 활동들로부터 떼어내어 시장 법칙에 종속시키면 인간들 사이의 모든 유기적 존재 형태는 소멸되고 그 자리에는 대신 전혀 다른 형태의 조직, 즉 원자적 개인주의의 사회 조직이 들어서게 된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439쪽) 이는 마네트 박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평민이었고 죄수였으나 영국에서 그는 의사이자 아버지가 된다.

그렇다면 다네이는 이제 어디에서 다네이일 수 있는가? 바로 가정이다. 가정에서 그는 루시의 하나뿐인 남편, 마네트 박사의 사위, 아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매우 한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단 그 밖으로 나가면 가정 내에서의 자신의 맥락은 아무런 효과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가정 내로 들어오면 그 밖에서의 맥락은 또 사라진다. 분면 런던 ‘밖’에서라면 원수지간이어야 할 두 사람이 가정 내에서는 둘도 없는 사위와 장인지간으로 살아야 했다. 이 분열은 다네이가 계속해서 루시 앞에서 자신의 본명도 밝히지 못하는 억압으로 작동했고 마네트 박사에게는 긴 세월동안 트라우마로 존재했다. 계속해서 자신이 처해 있던 “사회적 관행과 도덕관념이 뿌리채 뽑힌” 상황은 경제적 이익이나 가정의 한정적인 포지션이 해결해주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회피하고 있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가고 스스로의 사회적 맥락을 선취한다. 그것이 죽음으로 이어지든 아니면 영원한 트라우마의 재발로 이어지든 일단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직은 왕자나 왕족이 교사 계층으로 내려오지 않았고, 텔슨 은행의 계좌를 박탈당한 몰락한 귀족들도 요리사나 목수가 되기 전” (<두 도시 이야기>, 186쪽)의 이야기였다. <두 도시 이야기>의 배경이 1775년에서 1794년, 스피넘랜드 법이 1795년의 일이다. 모든 것이 경제적 문제로 환원되기도 전의 일이며, 인간 행동의 원천이 이익이라는 믿음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디킨스는 사회적 도시 파리와 개인의 도시 런던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사회의 자유


 

<두 도시 이야기> 에는 한 사람이 더 나오는데 바로 시드니 카턴이다. 다네이와 마네트 박사가 ‘뿌리 뽑혀’서 런던에서 개인이 되었다면 그는 애초에 ‘뿌리’랄 게 없는, 개인이라는 추상적인 단위로 있다.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소개되고, 그 외 얘기할만한 점이라면 지독한 술꾼으로 자신을 놓아버린 방종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런 부르주아 계급이 그렇듯 카턴은 루시로 대표되는 가정의 일원이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회복’할 뿌리 같은 것도 없어 보이는 그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디킨스는 카턴을 찰스와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마지막 ‘해결편’을 위한 장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루시를 사랑하고 그녀가 꾸린 가정을 동경하는 한편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점유하길 원했다. 그것을 위해 찰스는 파리의 귀족 신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카턴은 다네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선택을 한다. 그는 다네이가 ‘되어서’ 죽는다.

런던은 개인의 이익은 개인이 챙기라는 방임주의가 팽배했다. 그래서 <두 도시 이야기> 초반 런던 묘사를 보면 길거리에서 강도를 당해도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은행에는 자랑스럽게 인간의 유골이 마치 담보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파리는 어찌보면 런던의 저 모습을 달라고 외치는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 천부인권을 보장하는 인권선언문은 누구라도 자신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처분할 수 있고 누구든 ‘부당한’ 이익을 취해 전체에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철두철미한 경제적 논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어가 혁명정부이고 시민 일반이었을 따름이었다. 결국 ‘나’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손해도 미래에 손해를 끼칠 것도 싸그리 단두대에 올려 잘라버리겠다는 분노의 정조가 당시 파리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앞서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게 되면 ‘나의 손해 역시 나의 책임’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었다. 만약 사회를 ‘서비스’로 받아들인다면 더더욱 챙길 것은 ‘나’ 밖에 없다. 나에 대한 고집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나는 또 손해를 두려워하며 통장잔고가 얼마이고 직업이 무엇이고에 얽매이며 살 것이다. 나를 설명해 줄 것이 그것밖에 없으므로. 찰스가 한 일은 화폐가 곧 자신을 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다른 맥락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찌 보면 루시의 남편이자 프랑스 귀족인 ‘나’를 찾기 위한 모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카턴은 어떤 ‘나’를 선취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찰스라는 ‘남’이 되면서 일말의 전복을 꾀한다. ‘생명’과 ‘자아’라는 인간 최대의 이익을 내려놓으며 체제가 전제한 ‘경제적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인간’의 틀을 깬 것이다. 폴라니는 인간이 사회 실재를 받아들이고 최대한 사회를 변형시키는 노력을 한 후 인간의 자유가 드러난다고 했다. 그는 시장경제와 이중운동을 하며 저항해 온 사회의 차원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때의 사회는 인간이 계속 시장경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맥락을 지키려고 하는 성향의 차원, 공동체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카턴은 ‘한 사람 몫(개인)’이 얼마나 평등하게 있는가를 따지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너’가 되고 또 과거의 원한이나 미래의 손해에 무관하게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공동체적 인물로서 나타난 것이다.

다네이와 위치를 바꾼 카턴은 나중에 다네이도 카턴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는 처음 보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를 계속해서 위로하고 “시간이 없는” 천국을 이야기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파리 혁명세력의 몰락을, 그리고 런던 루시 가족의 변화를 예언한다. 그의 예언은 현 체제에 대한 불평이나 어떤 선택지를 따라야 한다는 제언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이 보게 된 자유에 대한 비전이 아니었을까.

 
  1. 회사를 그만뒀는데


 

(오언)는 사회란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그것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진리를 파악했다. 그의 사회주의란 사회 실재의 현실을 인식함으로써 인간 의식을 개혁하는 것에 기초를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지금 여러 새로운 종류의 권능을 얻으려는 찰나에 서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권력으로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사회악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그것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악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며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애 같은 불평불만을 그만둘 것이다.” (367)

 

회사를 그만뒀는데, 아니 사실 아직 그만둔 건 아니고 그만두겠다고 말했는데 팀장이 ‘공부하는 건 좋은데 돈은 어쩔거냐. 짧게 야간이라도 해라.’ 라는 유혹(?)을 했다. 재밌는 건 그 순간 채운쌤이 얘기하신 세미나 반장 장학금이나 기타 관리 비용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파노라마로 지나가며 잠깐 팀장의 유혹에 ‘휘청’ 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논리에 내가 이렇게 취약하다. 돈만 벌면 그만큼 나는 ‘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고 또 남과 뭔가를 함께 하면서 역할이 칼같이 나눠져 있지 않으면 불편하다. 내 방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은 가족이라도 싫고 돈 때문에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미래를 상상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와서 알바라도 해’ 라고 하면 거절 하는 일 없이 응하곤 했던 것이다.

내 인생은 이런 수동적인 몇몇의 모먼트가 있어 계속해서 흘러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극도의 수동성의 결과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회와 사측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 그리고 나 자신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부채감 같은 것이었다.

폴라니에 따르면 경제적 이득의 목적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 사회 문화적인 것에 따른다. 그런데 시장경제는 그것을 무시하고 이익은 또 다른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이 순환에 한번 포섭되면 그 다음 이익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그렇지 않을 경우 닥치게 되는 막연한 손해에 대한 두려움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게 된다. 이 굴레의 무서운 점은 내가 그것이 편하고 또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계속해서 내가 이 순환을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이때 폴라니가 사회를 강조하는 것은 사실 다른 게 없다. 그동안 철학시간에 숱하게 들었던 ‘있는 그대로를 봐라’다. 나의 수동적인 분노나 불안을 종식시킬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래야 제도나 임금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고 그것이 편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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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9 17:41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이 보게 된 비전에 반하셨구려! 혜원의 "재생"을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