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5월 28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5-26 00:16
조회
113
“음악이 정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요? 사유에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을? 사람들이 음악가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을? ― 추상이라는 회색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며 지나간 듯합니다 ; 사물의 온갖 금사 세공을 비추기에 그 빛은 충분히 강합니다 ; 큰 문제들이 거의 포착됩니다 ; 세계가 마치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내려다보입니다.―내가 바로 철학적 파토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같네요.”(니체, 《바그너의 경우》, 책세상, 19쪽)

예전에 동네 코인노래방 입구에 “음악이 없다면 삶은 오류일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라고 적혀있던 걸 본 기억이 납니다. 동네 노래방에까지 강림하신 니체님의 넓은 스펙트럼에 놀랐더랬죠. 니체는 유명한 음악 애호가입니다. 이번 첫 시간에 함께 읽은 《바그너의 경우》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니체는 음악과 철학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이 말에 대해서는, 니체처럼 음악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쇼펜하우어 또한 동의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사람이 음악을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으로부터 같은 평가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물질적인 차원을 매개하지 않고 ‘물자체(의지)’를 직접 모사한다는 점에서 예술 중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신비적 본질 같은 것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철학과 음악의 유사성을 발견했던 것이죠.

쇼펜하우어는 음악에서 형이상학적인 의미 같은 것을 끄집어내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니체는 바로 이런 식으로 형이상학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일을 극도로 혐오했던 것 같습니다. 니체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 어떤 신비한 의미 같은 것을 품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우리의 감각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변용시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악은 우리 신체에 낯선 리듬을 작동시키고, 그 선율과 더불어 모든 것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느끼도록 하고, 때로는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문제들을 ‘마치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바라보도록 합니다. 이처럼 니체는 음악을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작용의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비제를 찬미할 때에도 니체는 비제 음악의 명랑성과 건강성에 대해 말하지, 그의 음악이 ‘의미하는 바’ 따위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니체는 음악은 철저히 음악의 언어로 세계를 표현해야 하고, 청중으로 하여금 음악이라는 예술적 양식을 통해서 세계를 감각하고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음악이 형이상학의 언어를 빌리기 시작할 때, 무언가를 ‘의미’하려고 할 때 그것은 부패하고 몰락하기 시작한다고 니체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를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바그너는 음악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그너는 언제나 ‘구원’을 말하고 거대하고 비장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면서,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소수를 만족시키고 고양시키려하기보다는 대중으로 하여금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위대한 이념을 숭배하도록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음악을 형이상학으로, 이념으로 오염(=신비화)함으로써 바그너는 나름의 방식대로 탐구하고 음악을 향유하고 해석하려는 의지들을 배제합니다. 니체가 묘사하는 것을 보면, 바그너는 거의 음악을 유혹의 수단으로 삼은 기독교 사제에 가깝습니다.

《바그너의 경우》를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한때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을 완벽하게 부정할 수 있는 니체의 과감함과 미학의 문제를 시대 전반의 징후로 읽어낼 수 있는 니체의 예리함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본격적으로 《우상의 황혼》에 돌입합니다. 124페이지 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아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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