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6월 4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5-31 11:19
조회
127
“삶의 가치라는 문제를 도대체 살짝이라도 건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삶의 외부에 위치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개인이 체험하듯이, 많은 사람이 체험하듯이, 모든 사람이 체험하듯이 그 모든 삶의 내용에 정통해야만 한다 : 이 점을 삶의 가치라는 문제가 우리로서는 접근 불가능한 문제라는 점을 파악하게 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가치에 관해 논할 때 우리는 영감 아래, 삶의 광학 아래 논한다 : 삶 자체가 우리에게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며, 우리가 가치를 설정할 때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 평가를 한다……”(니체, 《우상의 황혼》, 백승영 옮김, 책세상, 110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도 나오지만 니체는 염세주의와 낙관주의를 모두 유치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 가치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어떤 한 순간조차도 삶에 대해 외부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가치를 매기는 그 평가의 관점조차 우리는 삶 속에서 얻게 됩니다. 또 사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삶 자체’ 같은 것도 없는 게 아닐까요? 삶이란 우리의 살아감을 통해 매순간 표현되고 있을 뿐, 그러한 차원을 떠나서 우리가 대상화할 수 있는 ‘삶 자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 내리는 평가가 보여주는 것은, 삶의 가치가 아니라 그렇게 가치평가 하고 있는 우리의 생리적 상태, 우리의 건강성, 우리의 힘의 유형입니다. 삶에 대한 것을 포함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가치평가는 우리의 삶의 양식과 존재 방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삶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동시에 무엇을 인식하고 무엇을 가치평가하고 무엇에 대해 말하건 우리는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잘 정리가 안 되네요^^;).

따라서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모든 현자들이 삶의 무가치함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는 사실은, 삶 자체가 아니라 현자들의 생리적 상태를 증언한다고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니체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걸까요? 니체가 소크라테스의 외모를 조롱하는 부분(“그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사람들은 알고 있으며, 직접 확인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못생긴 외모는 그 자체로 일종의 이의 제기이고, 그리스인 사이에서는 거의 반박이기도 했다”)에서는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근거를 들어 정당화’하려고 하고 ‘이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의식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적 ‘진지함’을 니체가 가볍고 명랑하게 패러디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도 나오지만, 니체는 무엇과 싸우느냐 보다도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진지함’에 ‘진지함’으로 맞서는 것은 단지 데카당스를 또 다른 데카당스로 대체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몰락해가는 그리스에 대해 바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무절제한 본능들에 맞서기 위해 본능을 절멸시키려는 자. 이에 비해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부정하고 제거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언가를 비판할 때, 우리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절멸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닮게 되거나 그와 같은 유형의 힘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쉽사리 부정하지 않으며, 긍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우리의 명예를 찾는다. 우리는 점점 더 성직자와 성직자 안에 있는 병든 이성의 성스러운 난센스가 배척하는 모든 것을 여전히 필요로 하고 사용할 줄 아는 경제학에 눈을 떠간다. 이 경제학은 위선자나 성직자가 덕 있는 자들과 같은 유형들에서도 자신에게 유익한 점을 끄집어내는 삶의 법칙 안에 깃들어 있는 경제학이다―어떤 유익한 점이란 말인가?―우리 자신이, 우리 비도덕주의자들이 여기서의 대답이다……”(니체, 《우상의 황혼》, 백승영 옮김, 책세상, 112쪽)

니체는 열정과 관능과 적개심을 ‘정신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열정과 관능과 적개심은 종종 우리를 우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온갖 번뇌와 갈등이 유발되죠. 이에 대한 지성적이지 못한 해결책은 본능의 절멸을 위해 그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거세와 절멸.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방식이죠.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금욕주의는 자기 안에 스스로 척도를 세우기에는 너무나 무능력한 자들의 것입니다. 완전한 무절제와 절대적 복종은, 사실 윤리적 무능의 상이한 표현일 따름입니다.

니체는 이 모든 본능들과 지성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 이때 지성적 투쟁이란 열정, 관능, 적개심 같은 본능과 충동들을 필연성 속에서, 보다 넓은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의 적이 우리를 살게 하며 “싸움의 포기는 위대한 삶의 포기”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적과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역량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적의 절멸을 욕망하는 대신에 존경할 만한 적을 능동적으로 요청하게 되겠죠.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들과 공존할 수 있는, 혹은 보다 능동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 이것이 비도덕주의자가 갖는 긍정의 윤리입니다. 니체는 심지어 교회와 성직자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부정해 마땅한 모든 것들에는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들의 유익함에 대한 증거는, 그것들과 싸우고 그것들을 극복하며 더욱 가볍고 명랑하고 삶을 긍정하는 자가 된 우리들입니다.

다음주에는 《우상의 황혼》을 170페이지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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