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카프카 우주여행! 라스뜨 공지

작성자
손지은
작성일
2018-03-16 02:23
조회
148
와웅! 스피디한 영자매(보영&나영)가 벌써 후기를 올려주셨네요.  영자매의 후기에 힘입어 공지도 후닥 올립니다~ ^.^


# 변신, 경계의 존재들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변신’이라는 테마를 공유합니다. 인간에서 갑충으로,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변신. 하지만 변신을 해서 완전한 갑충이 된 것도, 완전한 인간이 된 것도 아닙니다. 윤영의 말처럼 ‘벌레’, ‘인간’, ‘원숭이’라는건 인간에 의한 규정이고, 인간의 시선으로 명명된 것일 뿐 그들 자신은 그 무엇도 아니죠. 카프카의 소설 속에는 ‘과정’만 나와있을 뿐 어딘가에 완전히 도착해 있는 존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동시에 벌레의 행동방식을 취하며, 페터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동시에 침팬치와 동침하지요. 정확히 말해 이들은 동물도, 인간도, 갑충도 아닙니다. 인간과 갑충 사이, 원숭이와 인간 사이, 경계, 문턱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 한계, 변신의 출발점
경계/문턱에 선다는 것,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레고르는 어느날 갑자기 갑충이 됩니다. 페터는 어느날 갑자기 인간에게 포획되어 철장에 갇힙니다. 이런 한계는 그들로 하여금 출구를 찾게 합니다. 경계/한계는 마치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감옥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이 한계가 아니라면 언제 출구를 찾으려 할까요? 한계는 바로 우리의 출발선상이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고개를 돌리거나 작은 구멍을 찾게 됩니다. 이것은 더 멋진 한계를 찾기 위해서도, 아무런 한계가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이 한계를 겪어내고 자기 눈앞에 있는 단 하나의 문턱을 넘을 뿐입니다.


# 자유가 아닌 출구를! 
페터는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문만 넘으면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꿈꾸며 ‘자유’라는 말에 기만당하곤 한다고. 변신하는 존재가 찾는 것은 ‘절대적 자유’가 아닌 ‘단 하나의 출구’입니다. 그 출구가 비록 하나의 착각일지라도,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또다시 벽이 나올지라도, 지금 여기서 숨쉬기 위해선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문이나 여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턱이 어떤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자신의 존재 조건을 공부하고 연구할 때만이 출구는 벽과 함께 찾아집니다. 


# 종족과 종족 바깥을 구분하는 ‘언어’ 
<어느 개의 연구>에 나오는 일곱 마리 개들은 음악(혹은 소음)과 물아일체가 되어 언어를 잊은 상태의 몸짓을 보여줍니다.작은 강아지(연구하는 개)는 일곱 마리 개들이 만들어내는 몸짓에 충격을 받고 질문을 던지지요. 개라는 종족에 대해, 개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러나 일곱 마리 개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퍽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언어에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기능만이 아닌, 한 종족이 공유하는 문화와 정서, 무의식이 담겨있지요. 그런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더이상 개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변이가 일어났기 때문일거예요. 그런점에서 언어는 종족과 종족 바깥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실로 원숭이 페터가 인간 무리에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헬로우!”라며 인간의 소리를 터트리고 부터입니다. 이 소리로 인해 페터는 인간 공동체 속에 뛰어들게 되지요. 하지만 페터는 학술적인 관계에서만 인간의 언어로 말할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침팬치와 자신들의 언어를 나누겠지요. 원숭이와 인간의 언어를 두루 구사할 수 있는 페터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으면서 벌레로 말하는 그레고르는 어느쪽에 속한다고 해야할까요. 언어를 통해 볼때 그들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않는 정말 경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다음주 예고 >> 
다음시간은 에세이 초고를 발표합니다. 글의 형식은 ‘카프카 찬미’가 되겠습니다 ㅎㅎ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골라서 찬미할 포인트를 병렬적으로 나열해서 잡아오시면 됩니다. 찬미는 추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논거를 찾아 아주아주 구체적으로 작성합니다. 또 이 글은 누군가에게 카프카 사랑을 전도할 목적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만 카프카를 사랑하다 끝나서는 안되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의 카프카 찬미가를 읽고 ‘아! 정말 카프카가 미친듯이 읽고 싶어’라는 마음이 일도록 내 사랑과 정렬을 다해 ‘설득력 있는’ 찬미가를 쓰는 것이 목표입니다. 다음시간은 작은 규모의 찬미 배틀이 될테니 맘 단디 잡고 오시고요~ 담시간 간식은 강석샘이 준비해주기로 하셨어요. 감쐅니다! 담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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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6 07:29
    갑충인 그레고르와 빨간 페터 원숭이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는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장자와 혜자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혜자가 장자에게 "자네는 물고기도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아는가." 장자는 "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물가에서 알았지" (메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