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년간의 카프카 셈나를 마치고

작성자
손지은
작성일
2018-03-30 03:58
조회
257
장장 1년간의 카프카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후기니까 내용 정리보다도 카프카를 공부했던 1년간의 감회를 여한없이 풀어보려 합니다. (하고싶은 말 대잔치입니다ㅋ 하하)

뜬금없지만 저는 말귀를 잘 못알아들어요. 이해도 느리고, 뭘 들으면 구조 파악이 안되서 혼자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때가 수두룩하고요. 그런 제가 카프카 세미나에서 그나마 한 두마디라도 얹을 수 있고 겨우 반장 구실을 하게 된건 선민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1년 전 이맘때, 백치 상태의 저를 붙잡고 선민샘이 그러셨어요. 세미나 끝나고 딱 30분만 시간을 들여서 세미나 내용을 정리해 보라고요. 더 시간 낼 것도 없이 딱 30분만. 그 이후로 저는 카프카 세미나가 끝나면 기록한 토론 내용을 다시 한번 주제별로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좀더 정신차리고 사람들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러다보니 ‘지금 이 세미나가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걸 알게됐어요.

저한테 카프카 세미나는 “지금 여기밖에 없다”는걸 강렬하게 각인시켜 준 시간이었습니다. 세미나하는 중에 뭔가가 만들어지고 해체됐다 이어붙여지는 경험을 정말 매시간 했던거 같아요. 머릿속이 확확 돌아가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연결 지점이 막 생기고, 작품의 질감이 달리 보이면서 정말 끝도 없이 길이 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그리고 어디 다른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길을 만들어내는 게 유일한 출구라는 것도요.

이렇게 어디로든 길이 날 수 있는 텍스트인데, 왜 혼자 읽을 땐 그런 다양한 길들을 발견하지 못했던걸까! 놀라면서도 그만큼 토론이 주는 힘을 체감하곤 해요. 뭣 모르는 채로 카프카의 일기를 읽고, 뭣 모르는 채로 카프카가 쓴 편지를 읽고, 단편과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모르겠는 채로’ 1년을 보냈네요. 그런데 이제야 발견한건 그 ‘모르겠는 지점’이 계속 달라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왜 연구견은 단식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질문은 ‘한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한계와 한계가 맞닿는 세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러면 세계는 여러 개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하는 식으로 질문은 끝없이 이어져요. 아마 이것이 카프카 작품이 가진 놀라운 점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이것은 저 혼자의 발견이 아니라 세미나 하는 중에, 그 단 몇 시간 안에 벌어지는 일들이예요.세계는 균질적인 평면 위에 있는게 아니고, 우리는 모두 다른 지평(그것도 움직이는 지평) 위에서 세계를 만들어내고, 세계는 이동하는 속에서 펼쳐지고, 계속해서 세워지고 허물어지는.. 정말‘과정’밖에 없다는걸 누누히 확인하게 해준 시간. 보영이는 세미나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걸어가는 움직임 속에서 세계가 다르게 느껴지곤 했대요. 이게 바로 ‘산책의 문체’가 주는 효과일까요? 우리의 세미나는 정말 산책같았습니다. ‘내가 읽었던게 읽은게 아니었구나’하고 생각이 확 깨지는 상쾌함을 맛보면, 비록 세미나 오기 전까지는 골머리를 싸매더라도 세미나하는 이 자리에선 왠지 가뿐해지는 것이죠ㅋ

카프카는 자유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차라리 ‘벽’을 선물해준거 같아요. 사방에서 죄어오는 벽, 머리를 짖찧을 수 있는 벽. 카프카의 세계에선 무언가를 벽으로 느끼고 벽을 직면한 자만이 출구를 찾는 감행을 시작하니까요. 그레고르가 갑충이 되고나서 6면의 벽을 모두 기어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든 것처럼요. 우리는 주어진 한계조건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철저한 인식, 이것이 묘하게 주어진 상황을 절대긍정하게 만들어요. 지금 여기밖에 없으니까 이 세계를 떠난 어딘가를 꿈꾸지 않게돼요. 여기서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돼요. 벽을 만날 때마다 카프카에게 얻은 이 귀한 배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세미나가 끝났으니 카프카에게 작별을 고하기보다, 이제야 카프카를 읽을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이예요. 곧 선민샘이 준비하고 계신 책도 나올거고, 아직 읽지 못한 맑스브로트의 카프카 평전과 잠언집도 있고요.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카프카의 일기를 넘겨보며 한문장 한문장 곱씹어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네요.

다음주에 세미나가 없다는 게 실감이 안나네요. 지니샘, 보영, 강석샘, 승희샘, 나영, 윤영! 어느 세미나에서라도 꼭 다시 만나요(꼭이요!).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왜이리 아쉬운가 몰라~ㅋ 일년간 정말 감사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엔 없지만 함께 했던 수경언니, 영우샘, 성연샘, 덕체샘께도 감사 인사 전해요.

 


2018.3.29 카프카의 우주를 여행하는 8가지 방법, 에세이날 두둥!


카프카의 우주를 여행하는 8명의 여행자 or 일곱 마리 예술견과 한 마리의 연구견ㅋ

 

카프카 셈나의 미녀 삼인방~ 윤영, 나영, 보영ㅋ 선민샘이 매의 눈으로 노리는 타겟이기도 하죠ㅎㅎ "이거 끝나면 무슨 공부 할거야?"

 

<실종자>에서 영감을 얻어 포스터를 제작해온 윤영. 실종자 찾아주고 싶은데 포스터에 거울이 달려있어요. 실종된건 나 자신? 호호

 

윤영의 또 다른 작품. 한 주간 이거 만들면서 얼마나 신났을까나~ㅋ (모델:승희샘)

 

자세히 보면 표지에 '나의 실종'이라고 씌여있어요. 주어가 들어간 부분에 구멍이 송송 뚫린 책.

 
전체 5

  • 2018-03-30 08:22
    카프카는 "어머나!" 였던 것 같습니다. 유령과의 마주침이라고 할까. 꿈같은 기록은 현실과 비현실, 우연과 의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접근할 수 있는 것과 접근할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착각이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카프카(텍스트)는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결코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에게는.

  • 2018-03-30 08:23
    카프카가 선물한 것은 벽이었구나! '길은 굶주림을 뚫고 나아간다' 굶주림이란 한계(벽)를 물어뜯는 행위! 보영이의 말대로 '카프카 읽기는 이제부터!' 입니다. 얏호! ^^

  • 2018-03-31 14:33

  • 2018-03-31 23:41
    혼자 만났다면 당황스럽게 뒷걸음질치고 잊었을 텐데, 함께 해서 그나마 카프카를 오래 바라보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마지막 에세이와 개인후기는 숙제방에 올렸습니다.

  • 2018-04-01 10:40
    지난 여름, 카프카를 알고싶다는 마음으로 여기에 처음 왔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새 봄의 문턱(+_+)에 와 있네요. 놀랍게도 일년 전 카프카 글을 읽을때나 지금 읽는거나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 여전히 당혹스럽고 알쏭달쏭한 그의 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예전과 지금… 뭐 이런 구분이 정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몸소 체험하게 해주신 카프카… 그렇기에 세미나는 끝났지만 카프카 읽기는 끝난게 아닌거겠죠?

    이거 도대체 뭘까 이사람 왜이럴까 하면서도 계속 그의 글을 읽고 싶은 건 그의 글과 삶이 전하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고, 그 울림에 매료되어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연구하는 연구견 ㅋㅋ 들과 함께한 이 세미나 덕분일거예요. 일렁이는 세계의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고 물에 빠지던 이 시간, '하루에도 다섯 번 씩 새 집이 무너져내리던' 이 시간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하고 따라가며, 그가 선물한 폐허 위에서 또 다른 발걸음을 하나하나 내딛고싶어요! 저를 여기에 오게 한 글이자 제가 넘넘 좋아하는 글 <돌연한 출발>속 구절인데요, 목적지도 예비양식도 없이 떠난 이 여행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여행"이었습니다. 함께해서 정말정말 즐거웠어요. 진심으로 감사해요. 또 다른 여행을 하다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만나요 우리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