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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시즌3_에세이_카프카의 예술론_수정

작성자
gini
작성일
2017-12-06 23:23
조회
117
구스타프 야누흐가 쓴 [카프카와의 대화]에는 카프카의 예술관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160장) 여기서 카프카는 대가, 배우(엔터테이너)를 한 축에, 그 반대편에 시인과 예술가를 놓고 대비시키고 있는데, 아폴리네르는 앞쪽의 대표, 클라이스트는 반대쪽의 대표다.

카프카에게, 대가인 아폴리네르와 예술가인 클라이스트는 뭐가 다른가? 두 사람은 무엇을 했는가?

카프카는 아폴리네르를 칭하여 ‘시각적 만남을 환상으로 통합하는 재능의 대가’라 하고 있다. 아폴리네르의 대가적 재능은 통합하는 것에 있다. 환상으로 통합하는 재능. 아폴리네르는 현실의 요소들을 따로따로 분리하여 그것들을 자유롭게 조합한다. 그랬던 이유는 아폴리네르가 재현을 극도로 거부했기 때문인데, 아폴리네르는 ”예술이 상형적(象形的)이고 상징적인 것이 되기 위해 사물 그대로의 재현적인 것이기를 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예술은 상형적, 상징적인 것이어야 하나? 그것은 아폴리네르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아폴리네르에게 현실은 우리의 심층을 형성하지만 언제나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어 온 ‘어두운 힘들’, 그것이 억압된 결과였다. 따라서 예술의 역할은 그 힘들의 폭발을 보여주고 폭발로 해체된 요소들을 다시 조합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폴리네르의 예술은 현실의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은 것들 즉 상징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시구는 흐릿하고 윤곽이 없으며 암시적이고 음악적이다. ”그의 시구는, 흐릿함을 더하기 위해 일부러 구두점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언제나 그 윤곽을 잡을 수 없게 하는 일정의 영롱한 안개 속에서, 암시적으로, 노래하듯이 흘러간다. 전체가 음악적이고 신비로워,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준다.“(G.랑송, P.튀프로, 랑송불문학사, 정기수 엮음, 을유문화사)

아폴리네르의 시는 독자를 매혹시킨다. 독자를 자신이 만든 상징의 세계 속에 빠뜨릴 만큼 아폴리네르가 구축한 언어의 세계는 완벽하다. 그러나 매혹된 독자도 언젠가는 자신의 현실과 마주쳐야 한다. 그리고는 발견할 것이다. 아폴리네르의 세계와 자신의 현실이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아폴리네르의 세계는 사라진다. 카프카가 ”예술은 갑자기 사라지는 당혹스러움의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본보기의 문제“라고 말할 때 왜 카프카에게 아폴리네르의 글이 예술일 수 없는지 알게 된다.

예술가가 창조하는 것은 세계관이다. 그러나 세계관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카프카가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이다. 예술은 일시적인 경탄의 대상이기만 하면 안 된다. <첫번째 시련>의 곡예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완벽한 기술을 구사한다. 단식광대는 단식 기록 보유자다. 훌륭한 배우는 관객의 눈을 끌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다. 경탄과 함께 구경꾼을 만들어내는 자는 배우다. 그러나 그것이 다라면 두 광대는 그저 훌륭한 배우일 뿐이며,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관객 역시 구경꾼이기를 멈추는 순간 무대 위에 존재했던 하나의 세계, 배우와 관객이 공유했던 그 세계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고, 배우가 보여준 그 세계를 관객이 체험하고, 그래서 그들의 삶이 그 체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면 그때 배우는 예술가로, 그 무대는 예술이라 불릴 수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이해 가능한 보편적인 표현이 되게 하기 위해 ‘출산’과 같은 고통을 거쳐야 한다.

나는 모든 대가다운 재능에 반대해요. 대가는 마술사의 노련함으로 사태를 장악하죠. 시인은 사태를 장악할 수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는 신이 자신의 창조물에 사로잡혀 있듯이, 자신이 체험하고 묘사한 세계에 붙잡혀 있어요. 세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인은 마음속에 세계를 세우죠. 그것은 대가의 행동이 아니에요. 그것은 출산이며, 다른 모든 출산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번식이에요.

시인은 신이 ‘자신의 창조물에 사로잡혀 있듯이 자신이 체험하고 묘사한 세계에 붙잡혀’ 있다. 카프카에게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난 다음 저 윗자리에서 자신의 창조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창조된 세계가 신 자체이며, 창조가 무한하게 지속되는 한 신은 자신이 창조하는 세계와 함께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있는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붙잡혀있지 않기 위해 계속 창조해야 한다. 카프카에겐 예술가도 그렇다. 예술가가 체험하고 묘사한 세계가 바로 예술가 자체며, 예술가는 이 세계에 붙잡혀 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붙잡혀있는 예술가는 출산을 계속함으로서 그 세계로 부터의 출구를 마련한다.

아폴리네르는 출산을 하지 않았다. 출산은 밖에다 하는 것이 아니다. 카프카의 출산은 자기 마음속에 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먼저 그 세계와 하나가 된다. 즉 예술가 자신이 출산을 통해 변신해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존재다. 카프카에게 아폴리네르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위에서 만족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만 보고 있다. 이러한 아폴리네르는 클라이스트가 가진 ‘모든 성공적인 출산에 필수적인 힘들, 즉 겸손, 이해 그리고 인내가 결합’된 힘을 결여하고 있다. 출산이 아닌 창조는 동일한 세계만을 반복시킨다. 창조자 자신이 변하지 않는 창조는 창조가 아니며 자신의 변신이 새로운 창조의 필수적 동력이 된다. 창조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그 창조가 출산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생애 전체는 그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언어로 조명하고 모사한 인간과 운명 사이의 환상적인 긴장에 압박을 당하면서 굴러갔어요. 그의 환상은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체험의 산물이 됐다고들 말하죠. 그는 언어의 곡예나 주석 그리고 암시를 사용하지 않고 환상을 얻으려고 노력했어요.

예술가는 관객을 마술로 장악하지 않는다. 관객을 매혹시켜 단지 구경꾼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카프카는 클라이스트의 생애를 얘기한다. 클라이스트의 생애와 그의 소설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는 ‘인간과 운명사이의 환상적인 긴장’ 에 압박당하며 살면서 자신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언어로 조명하고 모사’했다. 클라이스트가 사는 그 세계는 클라이스트의 세계라는 면에서는 환상이지만 독자는 그의 삶 자체인 그의 글을 통해 누구나 체험하는 환상이었다.

예술가의 삶은 관객으로 하여금 경탄을 넘어 체험 가능하도록 만든다. 그 체험을 통해 변화되는 관객은 예술가에게 또 다른 창조의 자양분이 된다. 예술가의 환상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피어오른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그들 간의 관계 그 관계를 감싸고 있는,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운명의 그물망을 볼 수 있는 감각, 이러한 감각을 가진 자들 중 예술가는 자신의 환상 속에 갇혀 출산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다수의 경탄이 아닌, 보고 싶고, 알고 싶은 자라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알게 된 자들의 삶을 통해 예술가는 또 다시 세계를 새롭게 감각하게 되며 새롭게 창조해낼 수 있다. 인간을 보는 예술가와 예술가를 보는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창조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카프카의 예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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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07 20:01
    선생님, 이 주제에 집중하셨군요. ^^ 아폴리네르, 클라이스트, 그리고 카프카 작품이 구체적으로 분석되면 더 좋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