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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에세이 수정1

작성자
손지은
작성일
2017-12-07 13:17
조회
129
2017.12.7 / 카프카 단편 에세이 / <굴> / 손지은


- 굴의 유혹

<굴>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굴을 팠는데 잘된 것 같다. 밖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커다란 구멍 하나뿐(119)”이며, 누구든 “굴로 통하는 진짜 통로(120)”를 발견하면 “거기에 나의 굴이 다 드러나고, 내킨다면 밀고 들어와 모든 것을 영영 짓부수어 놓을 수 있(120)”을 것이라고. 마치 “아무도” 자신이 하는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굴의 주인이자 건축가인 화자는 자신이 가장 보호하고 싶어하는 ‘굴’의 비밀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묘하게 독자를 유혹한다.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흰 목을 드러내는 카프카 소설 속 여인들처럼, 굴의 주인은 자신이 가장 보호하고 싶은 그곳을 ‘열어두고’, 굴은 ‘하나의 입구’만을 지녔으며, 누구든 그 “진짜 통로(입구)”를 찾기만 하면 화자가 비밀스레 말하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강렬한 유혹을 일으킨다.

굴의 화자(그가 인간인지, 동물인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의 말을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으며, 그 밖의 다른 지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는 독자를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독자가 그렇게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전혀 염두하지 않고서, (그러면서 동시에)독자도 당황스러울 만큼 독자의 곁에 바짝 다가서서, 그의 주변을 애무하면서 말한다. 자신은 누군가 들어올 여지가 있는 “이 구멍 하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두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만 같다고.

이런 상황은 묘한 배치를 자아낸다. 굴의 주인이라 자임하는 화자는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사방으로 굴을 파며, 언제고 침입할지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한편 자신도 모르게 굴의 입구를 ‘알게 되어 버린’ 독자는 참을 수 없는 유혹으로 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헌데 ‘입구’, 즉 “하나의 다른 세상(137)”인 굴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이자, 굴의 밖과 안의 경계 지점인 그곳을 넘어가자 마자 입구는 ‘스스로 폐쇄된다’. 황급히 뒤 돌아보면 자신이 들어온 입구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남은 것은 ‘막혀있거나’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구멍들 뿐이다.


- 카프카가 파놓은 미로

막상 굴에 발을 들여놓게 된 독자는 수많은 세계들로 연결되어 있는 구멍들, 그리고 끊임없이 갈라진 길들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된다. 어디가 입구이고 어디가 출구인가? 입구는 이미 폐쇄되었다. 출구 밖에서는 굴의 화자가 감시하고 있다. 미로, 이곳은 한 번 발을 들이게 되면 길을 잃게되는 미로이자, 규정성을 벗어나 있는 공간이다. 굴의 형태는 그 주인에게조차 포획되지 않으며, 굴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건축가도 알 수 없다. 또 굴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기에, 부단히 변화하여 고정된 형태가 없다. 굴의 주인은 말한다. 자신조차도“자신이 만들어놓은 구조물 가운데서 잠깐 동안씩 길을 잃(130)”는다고.

헌데 이 읇조림을 들을 수 있는건 누구인가? 그건 오직 화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독자뿐이다. 독자는 어리둥절한 채로 굴의 주인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다. 굴의 화자는 말한다. “나는 즉시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더라도 전혀 예기치 못한 쪽에서 공격받을 수도 있을 것 아닌가?(120)” 그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적’을 상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이 달아날 굴을 파놓는데, 동시에 그것은 독자마저 길을 잃게 하는 행위가 된다.

어쩌면 카프카의 이 모든 말들은 독자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카프카는 굴 안으로 유혹하고, 누군가 입구를 통해 들어오면 입구를 폐쇄함과 동시에 그들이 ‘굴’을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원천 봉쇄해 버리는게 아닐까. 길을 잃는다는 것, 그것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그의 말대로 굴로 향하는 진짜 통로-입구는 정말로 하나였던가? 어쩌면 사람들은 카프카의 말을 믿고 굴의 입구를 찾아내지만, 그것은 굴의 주인이 파낸 구멍이 아니라, 실은 ‘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순진하게 믿은 독자 자신이 스스로 파낸 구멍이고, 그 어느쪽으로 들어가더라도 수많은 세계들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갈라지는 길들만을 보게되는 미로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분해로 인도하는 구멍들

그의 글쓰기 방식은 굴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다. 사람들은 그의 서랍 안에 매일 매일 일기인지 작품인지 알 수 없게 혼동되어 널부러진 파편들,순간 순간밖에 없는 조각난 글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틈들을 지닌 글을 해석하기 위해 의미화할 수 있는 요소를 끄집어내려 한다. 하지만 카프카의 글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저것’이라는 숨겨진 ‘본질’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프카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어떤 본질적 특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의 강박증과도 같은 사람들의 믿음이다. 주어진 것은 어디로든 열려있는 길들이며, 인접해 있는 것을 통해 끊임없이 모습을 달리하는 구멍들 뿐이다. 그 임시적인 모습을 진실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나 확신이며, 그것이 유효한 효과를 갖는다면 오직 그 사람에게만 진실일 수 있다.

카프카의 글에는 어떤 결정된 본질이 없다. 여기저기에 남겨둔 채 섞여있는 미완성의 글들은 서로 무한히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근접해 있는 어떤 조각과 연결되는가에 따라 계속 상이한 메세지를 방출한다. 어떤 구멍과 구멍을 연결시키는가에 따라 그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이 되며, 하나의 동일한 장면은 연결되는 다른 구멍들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갖는 사건일 수 있다.

굴파기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굴 안에서 끊임없이 구멍을 만들어내고 이전의 구멍 옆에 새로운 구멍을 슬그머니 덧붙여서, 현재 안에 다른 삶을, 이질적인 시간의 선을 끌어들인다.

전체 2

  • 2017-12-07 19:59
    지은이가 "굴"에서 문제삼는 것이 미로=본질없음 인지? 관건은 어째서 그것이 "다른 삶"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그렇다면 서론에서는 카프카 작품을 해석할 때의 어려움이나, 카프카 작품에 대한 통상적 해석의 미흡함을 문제삼으면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카프카식 굴파기의 특징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작품 "굴" 자체의 주제는 어떻게 굴파기의 과정 속에서 본질없이 변해가는지를 설명해주는 게 좋겠습니다. 손지, 화이팅!

  • 2017-12-08 12:56
    이글은 마치 <굴>이 왜 해석할 수 없는 지에 대한 얘기 같아. 그리고 <굴>처럼 카프카의 다른 이야기들도 그렇게 쓰인 것이라고, 서랍속 메모들처럼 파편화된 채 있는 것들을 그저 모아놓은 것이라고. 그러면 카프카 작품들에서 유독 <굴>이 카프카의 그런 방식의 쓰기를 드러내는 것인가? 다른 작품들도 '본질' 같은 걸 얘기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