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숙제방

카프카! 일단 헤어집시다

작성자
gini
작성일
2018-03-30 01:53
조회
125
카프카 세미나가 끝났네요.

 

노트북에 카프카 폴더를 열어보니 정말 꽉 찬 1년을 카프카와 지냈더군요.

 

마지막 시간에 잠깐 말씀드렸는데, 처음엔 정말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변신』만 알고 카프카를 너무 얕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변신』마저도, 좀 아는 줄 알았던 이 『변신』마저도(!), 정말 "깨알같은(선민선생님 워딩)" 트랩을 문장마다마다 갖고 있더군요! 매주 새롭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린 시절 '예술견'을 만났던 '어느 개(『어느 개의 연구』)'의 충격이 이런 것이었을 테죠. 충동적으로, 정해진 방향도 없이 내달리던 어린 개가 만난 '예술견', 돌아보니 '카프카'가 나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카프카를 만나고 내 앞에 새로운 세계는 열렸는데 그 낯선 세계를 어떻게 주파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길로만 다니는 것을 멈추기 위해 공부도 시작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려려니 하고 한 발 한 발 머뭇대며 왔습니다. 카프카의 세계에 내 발걸음이 내는 길을 따라서요.

 

카프카의 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이어서 꼭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광대'로 산다는 것과 '문턱'이라는 개념입니다. 문턱이라니 이 방으로도 저 방으로도 마음대로 왔다갔다할 수 있는 사이 공간을 말하는 것일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공간이라고요.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쿨하게 사는 건 줄요(^^). 문턱이란 이 방과 저 방의 끝이 맞닿아있는 곳입니다. 이 방의 극단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곳이 문턱이지요. 그러니 일단 그 극단에까지 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평범한 개가 '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 단식의 과정을 극한까지 밀어부처 도달하는 곳이 이 방의 끝입니다. 거기까지 밀고 갔을 때 평범한 개는 저 방, 즉 예술견으로 비약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냥 팍(!) 죽고 말 수도 있구요. 문턱은 쿨한 게 아니라 춥다는 말로도 부족하달만치 냉혹한 공간인거죠.

 

'단식광대'는 쇼무대에 설 때마다 이 문턱을 마주합니다. 반복할 때마다 '조금만 더' 하고자 하지요. 아마 반복할 때마다 문턱이 조금씩 더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단식 근육도 어느 정도까지는 붙을 테니까요. 그러나 한 신체가 갖는 물리적 한계는 분명 있는 법이니 끝은 반드시 오겠죠. 그런데 왜 단식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단식은 아무나 시작하지 않습니다. ‘어느 개’처럼 ‘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존재에 대해 질문을 가진 자만이 하지요. 질문은 지금 내가 심각하게 '벽에 부딪쳤다!'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단식은 질문에 답하는 방식입니다. 단식은 답을 구한다는 것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단식은 아무나 시작하지 않지요. 존재를 묻는 질문에, 존재를 걸고 답하려는 자가 하는 게 단식입니다. 그래서 시작하면 멈출 수 없습니다.

 

단식하고 하다보면 언젠가는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죽지만 않는다면요. 그러나 그때도 찾아진 것은 존재가 무엇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지식’은 아닙니다. 지금의 존재를 넘어서는 것이죠. 존재가 더 이상 문제시 되지 않는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식하던 ‘어느 개’가 ‘예술견’으로 변신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갑충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던 그레고르 잠자는 단식으로 다른 차원으로 갔지요.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차원으로요. ‘단식광대’도 지푸라기가 됩니다. 카프카에게 죽음은 존재의 다른 차원일 뿐입니다. 그래서 ‘죽음 아니면 변신’ 이렇게 분리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식으로 문턱에 다달은 존재는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변신을(죽음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를 떠나니 구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카프카가 신기한 것은 구원을 향해 가는 것 같으면서도 이 세계를 떠나지 않고 살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광대’라는 포지션이 중요합니다. 『어느 개의 연구』는 단식으로 이 세계의 문턱에 선 자의 그 후가 그려집니다. 개는 문턱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 삶의 터전을 잡고 개로 살아갑니다. 개는 잠시 예술견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예술견이 되어 사라지지는 않았지요. 개는 요컨대 자신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개답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 세계를 떠나 사라지지 않은 이상 예술견으로 사는 것도 아니지요. 개답게도 아니고 예술견답게도 아닌 그 사이에서, 문턱에서 개는 단식광대로 살기로 합니다. 개이지만 개처럼 먹지는 않는 굶는 개로 사는 것입니다. 개인데 먹지 않은 개는 개 세계에서 광대뿐입니다. 아주 희한한 묘기를 가진 유능한 광대인 것이지요. 카프카의 포지션이 여깁니다. 문턱에서 사는 광대! 그러나 여기가 어쩔 수 없어서 사는 비관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예술견으로의 비약을 유예한 공간이고 단지 그쪽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인 카프카가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빙빙도는 에세이를 끝으로 1년의 카프카를 마무리했습니다. 마지막 시간 선생님과 동학들의 코멘트를 받고 잊어버리기 전에 좀 더 선명하게 결말을 써보려고 좀 길어졌는데, 더 잘할 수는 없었겠죠? 아마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내가 부딪친 벽이 이 정도라서 이 정도로밖에 안 나오는 것이니까요. 다음 번엔 또 모르겠습니다.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두 감사했습니다. 다른 공부의 장에서 또 뵈어요.

 
전체 2

  • 2018-04-11 11:06
    저도 카프카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벽'(혹은 문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함께 '한번 더!'를 외칠 수 있었던 광대의 예술이야말로 카프카 스스로가 시도했던 실험이었어요. 지니 선생님의 후기를 읽으니, 감동이 다시 몰아칩니다. 그러니, 우리 또 만나요! ^^

    • 2018-05-02 02:08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야 보았네요. 제 글을 다시 읽으니 당시 엄청 감동했었구나 싶습니다. 더 놀라운 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내 글이 너무 낯설다는 것입니다. 차근차근 다시 카프카를 써보려고 했는데, 시작을 아직 못했네요. ㅎ 선생님의 카프카책이 나올 때쯤 저는 카프카 읽기 두번째를 하고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