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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3학기 에세이: 변신하기 위해 읽는다 <유형지에서>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12-10 01:54
조회
129
변신하기 위해 읽는다 < 유형지에서 >

유형지는 어떤 곳인가? 

유형지는 별 게 없는 공간이다. 주변은 황량하다. 헐벗은 언덕, 모래땅과 깊고 작은 계곡이 근처에 있는 전부다. 유형지에 있는 것이라고는 "계곡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189)있는 처형 장치 뿐이고 유형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처형 장치를 책임지는 장교, 처형을 선고받은 죄수와 간수, 그리고 이 상황을 관찰하러 외국에서 온 탐험가 뿐이다. 강렬한 햇살에 눈뜨기조차 힘든 이 곳은 한 번 들어온 이상 도망치지 못하는 곳, 의지할 외부가 없는 공간이다. 이 곳은 오로지 처형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자 변신을 준비하는 이들이 거쳐야 하는 공간,  읽는 공간이다.

장교와 처형장치 

유형지에서 장교는 탐험가에게 처형장치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한다. 장교의 설명에 따르면 처형이 이루어지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장교는 죄수를 유형지로 데려오고, 처형장치는 작동하면서 죄수의 몸에 글을 새긴다. 글이 새겨지고 나면 죄수는 구덩이에 묻힌다. 즉, 죽는다. 유형지가 읽는 공간이라면, 죄수를 데려오는 장교는 읽는 행위이다. 읽기라는 장교를 통해 죄수는 처형 장치, 곧 텍스트를 마주한다. 읽는 과정을 통해 죄수는 처형 장치 아래 눕게 되고 그러면서 처형 장치에 담긴 텍스트가 죄수에게 전달된다. 텍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밖에서 보면 해독할 수 없다. 외부인인 탐험가는 처형장치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도표를 읽지 못한다(182). 죄수 자신 역시 멀찌감치서 그것을 바라보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는 한 명 한 명의 죄수의 몸과 맞닿아 그의 몸에 글을 새기며 비로소 그때 그 때 의미를 드러낸다. 죄수는 처형장치 아래 직접 써레에 몸을 대야만, 그것도 맨 몸으로 누워야만 그 글자를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써레를 거쳐 텍스트를 해석한 자, 자기 행동의 의미를 해석한 자는 비로소 구덩이로 떨어져 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장교가 이번에 죄수를 데려온 까닭은 그가 태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팔팔한 상태로 보초를 서지 않고 잠을 자느라 근무에 태만했다(178). 장교가 판단하기에 삶을 태만하게 살아가는 자는 유죄다. 읽기는 그에게 태만이 유죄임을 알려주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거치는 단계가 있다. 일단 죄수는 자기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읽기(장교)를 따라 무작정 읽는 곳(유형지)으로 끌려온다. 읽기를 통해 죄수는 처형장치에 눕게 된다. 텍스트를 마주하는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처형 장치에 누워 죄수는 텍스트를 해석해내는 분별력을 얻는다. 12시간으로 정해진 시간은 짧지 않은 시간이고 괴로운 시간이다. 처음 텍스트는 죄수에게 그저 고통으로 다가온다. 처음 얼마동안 죄수는 지금까지 이어온 습관에 따라 맛있게 쌀죽을 먹지만, 곧이어 텍스트는 죄수가 먹은 것을 토해내고, 누렸던 즐거움을 뱉어내게 한다. 스스로 먹은 것을 스스로 내놓은 시간, 지금까지 이어온 습관을 거부하게 된 죄수는 분별력을 얻는다. 자신을 채우던 것에서 거리를 둔 그는 비로소 자기의 몸에 새겨져있던 계율을 해독하게 된다. 읽기라는 시각적 감각(눈)에서 시작한 이 일은 온몸으로 전해지고 죄수는 "상처로 글자를 해독"(183)한다. 그는 비로소 자기 삶을 채우던 것, 자신이 했던 행동과 자신이 보낸 시간이 품은 의미를 깨닫고 그런 다음 구덩이로 내던져져 죽을 수 있다.

죽음은 변신을 위한 과정, 읽기는 쓰기를 위한 과정 

해독(解讀)은 해독(解毒)이다. 읽은 자, 분별력을 갖춘 자는 원치 않는 독을 빼낼 수 있다. <어느 개의 연구>에서 연구하는 개가 "그들이 사랑하는 생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뼈를 열어 독극물을 빨아내려는 것(631)과 같은 맥락 아닐까? 독으로 채워진 몸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몸이 필요하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 하고, 변신해야 한다. 그는 독에 물든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야한다.  버리는 일은 유형지에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새 몸을 만드는 일은 유형지에서는 불가능하다. 읽기, 텍스트의 역할은 지금까지 채워진 독극물을 깨닫고 버리게 하는 데 까지다. 유형지는 죽기 위한 공간이다. 이제는 쓰기의 차례다. 탐험가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외국에서 온 탐험가는 유형지의 규칙을 잘 알지 못하고, 회의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 탐험가가 보는 앞에서 장교는 스스로 처형 장치에 눕는다. 처형 장치는 작동하며 톱니바퀴가 튀어나와 망가진다. 텍스트의 역할이 다했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인 변신과 탄생을 위해서는 텍스트가 더 이상 구원이 되지 못한다. 이제는 직접 새로운 몸을 채울 계율을 써넣어야 한다. 장교는 탐험가에게 회의에 참석해 크게 떠들거나 나직이 말하거나 하라며 그에게 선택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탐험가는 장교가 제안한 어떤 선택지도 택하지 않고 주어진 선택지를 벗어난 가능성을 생각해낸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스스로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탐험가는 쓰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쓰는 일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일이다. 그런 탐험가에게 장교는 "정당하여라!"(198) 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처형장치에 누워 처형장치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다면 유형지는 변신을 준비하는 공간, 변신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공간이자 읽기가 쓰기로 변신하는 공간, 태만과 독에 물든 몸을 버리고 새 몸으로 살아가기 위한 공간이다.
전체 2

  • 2017-12-11 10:44
    1. '읽기'와 '변신'의 관계가 설명되어야 합니다. 첫번째 문단에서 혹은 마지막 문단에서
    2. 장교라는 인물이 '읽는 행위'가 된다는 점을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3. 자기 행동의 의미가 "해석된" 자 = 죄수 라고 볼 수는 없나요? "지금까지 이어온 습관을 거부하게 된 죄수" 라는 문장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문단의 마지막 문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4. 기계의 부서짐에 대한 해석이 더 필요합니다.
    5. 스스로 선택지를 만들어가는 탐험가 라는 인물이 '쓰기행위'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역시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쓰는 일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일"이라는 정의를 카프카 작품을 통해 논증해야 합니다.

  • 2017-12-11 14:55
    카프카를 읽으면서 보영씨에게 가장 강력했던 것은 '자기변신'의 테마였던 모양입니다. 많은 작품을 그것으로 읽어내는군요. ^^
    [유형지에서]는 죄수보다, 장교가, 탐험가가 혹은 써레라는 기계 자체가 저에게는 더 흥미로웠었는데요. ㅎ